“이름 바꿔 떼돈 벌어보자”
  • 김은남 기자 (ken@sisapress.com)
  • 승인 2005.07.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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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개명 신청 봇물…유명 브랜드로 교체되면 집값 수천만원 올라

 
요즘 서울 영등포구 당산동 강마을삼성아파트 주민들은 서명 운동을 벌이고 있다. ‘삼성아파트’라는 명칭을 ‘래미안’으로 바꾸기 위해서이다. 이 아파트 관리사무소 관계자는 “올 초부터 서명을 받기 시작했는데, 현재까지 주민의 78% 정도가 동참했다”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왜? 이유는 한 가지이다. 이름을 바꾸어 몸값을 높이기 위해서이다. 과거만 해도 아파트 값을 결정짓는 요인이라면 입지·교통 여건·학군·단지 규모 따위가 꼽혔다. 그런데 2000년 3월 삼성물산이 ‘래미안’이라는 신규 브랜드를 내세워 아파트 시장에 돌풍을 일으킨 뒤 사정은 급변했다. 

그 뒤 e-편한세상(대림산업), 푸르지오(대우건설), 아이파크(현대산업개발), 캐슬(롯데건설), 자이(GS건설) 등 건설 회사마다 독자 브랜드를 쏟아내면서 아파트 브랜드가 집값을 좌지우지하는 주요 요소로 떠올랐다. 2003년 이용만 교수(한성대·부동산학)가 서울 강남구 아파트 시세를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아파트 브랜드 가치는 평당 최고 100만원에 달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쯤 되면 기존 아파트 주민이 개명에 목숨을 거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일단은 ‘촌스러운’ 이름을 갈아치우는 것만으로도 집의 운명은 바뀐다.

2002년 서울 노원구 상계1동 ‘은빛5단지 아파트’ 주민들은 아파트 이름을 ‘수락파크빌’로 바꾸었다. 강북구 미아6동 ‘미아풍림아이원아파트’ 또한 지난 연말 ‘삼각산아이원아파트’라는 새 이름을 얻었다. 그 뒤 이 아파트들은 개명 외에 별다른 호재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주변 아파트에 비해 높은 가격 상승률을 그리고 있다. 

대우건설 “한 달에 개명 심의 4~8건”

그런가 하면 상대적 박탈감 때문에 개명을 요구하는 아파트 주민도 있다. 기존의 삼성·대림·대우·현대·LG 아파트에 거주하는 주민이 바로 그런 경우이다. 이들은 삼성아파트·대우아파트 따위 옛 브랜드 대신 ‘래미안’‘푸르지오’ 같은 최신 브랜드를 달아달라고 요구 중이다. 

 이를 이미 성취한 데도 있다.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 ‘LG빌리지’는 최근 ‘문래자이’라는 새 이름으로 다시 태어났다. 이 아파트 주민은 2002년 9월 LG건설(현 GS건설)이 ‘자이’라는 브랜드를 출시하기 직전 이 아파트에 입주하는 바람에 손해를 보게 되었다고 주장한 결과 개명을 성취했다. 

입주 시기가 엇비슷한 아파트라도 새 브랜드가 등장하면 옛 브랜드 아파트는 낡은 듯한 느낌을 주게 된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었다. 같은 이유로 2002년 10월 입주한 서울 강서구 화곡동 ‘대우그랜드월드’ 주민 또한 지난해 5월 아파트 이름을 ‘화곡푸르지오’로 바꾸는 데 성공했다. 

아파트 개명이 쉬운 것만은 아니다. 일단 아파트 이름을 바꾸려는 주민은 까다로운 행정 절차를 거쳐야 한다. 현행 주택법이나 주민등록법상 아파트 개명에 필요한 절차를 밝혀 놓은 명문 규정이 따로 없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재량권을 발휘해야 하는 지자체들은 저마다 다른 기준을 요구하고 있다. 이를테면 ‘화곡푸르지오’ 아파트는 주민(소유자 기준) 50%의 서명을 받아 강서구청으로부터 개명 승인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주민 78%의 동의를 얻은 당산동 강마을삼성아파트는 구청 승인을 받지 못했다. 같은 영등포구 관할에 속하는 문래자이아파트의 경우 주민 100%가 서명한 동의서를 제출하고서야 개명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영등포구청의 한 관계자는 “100% 서명을 받는다는 게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것은 안다. 그렇지만 구청으로서는 혹시라도 반대 민원이 제기될 경우를 대비할 수밖에 없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아파트 주민 중에는 주소가 바뀌는 것이 혼란스럽다거나 등기 비용을 부담하기 싫다는 이유를 들어 개명을 반대하는 이들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아파트 개명은 가격 담합 행위?

시공사와의 협의 절차 또한 까다롭기는 마찬가지이다. 건설 회사들은 브랜드 관리 차원에서 브랜드 남용을 철저히 억제하고 있다. 그럼에도 새 브랜드를 쓰게 해 달라는 소비자들의 민원이 쏟아진다는 데 이들의 고민이 있다.

 
대우건설 브랜드심의위원회 김희정 차장은 “푸르지오 브랜드를 쓰게 해 달라는 민원을 한 달에 4~8건 정도 심의하고 있다. 그렇지만 브랜드 사용을 승인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라고 말했다.  

특히 건설회사 대부분은 새 브랜드가 나오기 전 시공·입주한 아파트에 대해서는 개명을 인정할 수 없다는 원칙을 세우고 있다. GS건설 마케팅팀 박지혜 과장은 “입주민이 좀 섭섭하게 여기더라도 어쩔 수 없다. 기존 아파트에 새 브랜드를 마구잡이로 달아주다 보면 브랜드 파워를 구축하는 데 차질이 생긴다”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여지는 있다. 건설회사들은 입주민들의 개명 요청이 있을 경우 해당 아파트의 상태, 프리미엄 정도 등을 따져 ‘소수의 예외’를 허용한다고 말했다. 이를테면 화곡푸르지오의 경우 푸르지오 브랜드가 나오기 전 입주가 완료되었지만 ‘살기 좋은 아파트’ 대상을 수상한 점 등을 인정받아 개명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자의적인 판단이 이루어질 개연성이 있다는 점이다. 한 건설회사 관계자는 “입주민들이 너무 강하게 나와 어쩔 수 없이 개명을 승인한 경우도 있었다”라고 말했다. 그 결과 아파트 입지 여건이나 내부 구조 등이 일정 수준에 미달하는데도 아파트 외관만 새 로고로 번지르르하게 치장한 경우가 있었다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아파트 개명시 시공사의 동의가 법적인 필수 요건은 아니라는 점이다. 앞서 설명한 대로, 개명을 원하는 입주민은 주민 동의를 받은 뒤 해당 지자체의 승인을 얻으면 된다. 최근 개명 절차를 밟고 있는 강마을삼성아파트가 논란이 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 아파트 입주 시기는 1997년으로, 래미안 브랜드가 나오기 3년 전이다. 8년 된 아파트인 만큼 시설도 낡은 편이다. 이 때문에 삼성물산측은 이 아파트의 개명을 인정하기 곤란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럼에도 이 아파트는 조만간 개명될 것이라는 입소문을 타고 집값이 들썩이는 중이다. 인근 ㅎ부동산 관계자는 “개명 얘기가 나온 뒤 입주민들이 매물을 일제히 거둬들였다. 개명만 이뤄지면 집값이 3천만~4천만원 뛸 것이라는 기대 심리가 팽배해 있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이곳 주민 사이에는 ‘우리가 힘을 모아 밀어붙이면 삼성도 어쩔 수 없을 것’이라는 정서가 강하다. 물론 입주민들이 일방적으로 새 브랜드를 사용했을 경우 시공사가 상표권 침해로 이들을 고소할 수는 있다. 그렇지만 이런 일은 지금껏 벌어진 적이 없다.
 
이렇게 주민이 일방적으로 개명할 경우 궁극적인 피해자는, 브랜드만 믿고 아파트를 새로 사게 될 소비자들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무분별한 아파트 개명 바람은 또 하나의 가격 담합 행위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 삼성아파트 입주민 황 아무개씨의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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