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적 만난 우파 ‘베테랑’들
  • 신호철 기자 (eco@sisapress.com)
  • 승인 2005.07.08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평화재향군인회’ 출범 임박…재향군인회법도 개정 움직임

 
원래 ‘나이 많은 사람’이라는 뜻인 라틴어 베테랑(Veteran)은 영어로 ‘퇴역 군인’으로 쓰인다. 한국에서는 재향군인회의 영어 표현(Korea Veterans)으로 쓰인다. ‘베테랑들의 모임’ 재향군인회는 아마도 법률로 규정된 법정 단체 가운데 가장 회원 수가 많은 조직일 것이다. 재향군인회에 따르면 정회원이 100만명, 준회원이 6백50만명이 넘는다고 한다. 대한민국 남자 3명 중 1명이 회원이라는 뜻이다. 이 막강 조직 재향군인회가 1952년 창립 이래 최대 위기를 맞았다. ‘평화 재향군인회’(가칭. 평군)이라는 대안 조직이 창립을 준비하고 있는데다, 지난 50년간 재향군인회를 지탱해준 재향군인회법이 개정될 움직임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평군은 오랫동안 군 개혁을 외쳐온 표명렬 예비역 육군 준장(66)과 김성전 예비역 공군 중령(47) 등이 결성한 예비역 장병 모임이다. 평군의 임시 회장 격인 표씨는 “지금 재향군인회(향군)가 너무 치우친 정치적 견해를 내세우고 있다. 헌법에 결사의 자유가 있는데 제대 군인 모임이 향군 하나밖에 없다는 건 옳지 않다. 또 군 개혁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장애물이 되고 있다. 국민의 신뢰와 지지를 받는 새 재향군인회가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그동안 재향군인회는 ‘이라크전 참전 촉구’ ‘국가보안법 사수’ 등 서울시청 앞에서 열리는 궐기 집회에 단골로 참석해 특정 정치 색깔을 보여왔다. 평군은 홈페이지(pcorea.com)도 만들고, 서울 서강대 인근에 사무실도 마련했다. 표명렬씨는 7월17일 제헌절 이후, 8월15일 광복절 이전에 평군을 출범시키겠다고 계획을 밝혔다. 평군에는 제대 군인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도 가입할 수 있다.

향군 “표명렬씨 주장은 반미·친북”

 
평군 출범에 대해 재향군인회는 펄쩍 뛰고 있다. 평군은 <향군보> 7월호에 ‘불법 단체 평화재향군인회에 현혹되지 맙시다’라는 광고를 내고 ‘표씨의 주장은 반미·친북 성향의 허무맹랑한 논리에 불과합니다’ ‘표씨의 저의는 우리 향군 조직을 와해하고 음해하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라고 비난했다.

향군은 법적인 수단도 동원해 향군 출범 저지에 나섰다. 최근 평군은 국가보훈처가 7월3일에 발송한 공문을 하나 받았다. 이 공문에는 ‘귀 단체가 사용 중인 명칭은 대한민국 재향군인회법을 위반하고 있으며, 법 규정 위반시  3백만원 이하의 과태료를 부과할 수 있음을 알립니다’는 등의 내용이 있었다. 국가보훈처는 “대한민국 재향군인회로부터 제재를 요청하는 문건이 접수되었다. 그래서 절차에 따라 평군에 사실을 알리는 공문을 보낸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사실상 재향군인회가 보낸 경고장인 셈이다. 이 으름장에 대해 표명렬 평군 임시 회장은 7월7일 ‘평화재향군인회는 가칭에 불과하다. 아직 우리는 공식 출범도 안 했다’는 유보적인 답변을 팩스로 보냈다.
표명렬 임시 회장은 “명칭 문제에 대해 법적 검토를 하겠다. 필요하다면 재향군인회법 개정 운동을 벌일 수도 있다”라고 말했다. 문제가 되고 있는 재향군인회법은 박정희 정권 때인 1963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재향군인회에 법적 지위를 부여하고 있다. 1983년 12월에 개정된 제2조 4항에는 ‘이 법에 의하지 아니하는 재향군인회를 설립할 수 없으며 이 법에 의한 재향군인회가 아니면 재향군인회 또는 이와 유사한 명칭을 사용하지 못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재향군인회는 이런 법적 지위에 따라 매년 막대한 국고 지원을 받고 있다. 2005년의 경우 국고 보조금 1백18억원과 보훈기금보조 2백14억원 등 3백32억원이 책정되었다. 또 재향군인회는 중앙고속 등 버스운송업과 관광업 등 각종 이권 사업을 벌이고 있다. 재향군인회의 수입원 중에는 회원들의 가입비도 있다. 하지만 7백50만 명이라는 회원 가운데 가입비를 낸 정회원은 100만명(향군 추산)에 불과하다. 향군 관계자는 “가입비는 병사·준사관·위관장교가 2만원, 영관장교 5만원, 장성이 7만원이다. 가입비 외에 별도 회비는 없다. 2004년 신규 가입자가 4만 명 정도다”라고 말했다. 가입비 수입이 연 10억원을 넘지 않는 다는 계산이 나온다.
재향군인회가 가지고 있는 독특한 법적 지위는 외국의 경우와 크게 차이 난다. 미국의 경우 연방 의회 승인을 받은 재향군인 단체가 32개에 이른다. 그 중 가장 큰 조직은 아메리칸 레전(The American Legion)인데 회원 수가 2백80만명이다. 연방 의회 승인을 받지 않은 단체까지 합치면 100개가 넘는다. 미국과 영국 재향군인 단체는 연 예산의 50~60% 정도가 회원들의 자발적인 회비로 충당된다.

평군 “향군은 편향된 정치 단체”

재향군인회를 유일무이한 단체로 규정한 현 재향군인회법이 불합리하다는 목소리가 정치권에서도 나오고 있다. 여당의 한 국회의원은 “재향군인회에 독점적 지위를 부여한 법은 문제가 있다. 이 참에 법 개정 작업에 착수하겠다”라고 말했다. 재향군인회가 긴장할 만 하다.
재향군인회의 <향군보> 성명은 ‘표명렬씨는 과연 누구입니까?’라고 물으면서 표장군의 부친이 ‘남로당 간부로서 빨치산 투쟁을 하다가 투옥되었다’고 가족사를 거론했다. 표명렬씨 부친 표문학씨의 행적은 표명렬씨의 아들인 표정훈씨(저술가. 표문학씨의 손자)가 쓴 <나의 천년>에 언급되어 있다. 정훈씨가 책을 쓸 때 가족사를 언급해도 좋으냐고 아버지에게 물어 허락을 받았다고 한다. 표명렬씨가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할 때 부친의 빨치산 경력은 알려지지 않았다. 아들 정훈씨는 책에서 할아버지의 좌익 경력은 부친이나 친척들도 잘 알지 못했던 것이며, 할아버지의 유품을 뒤져서 확인했다고 밝혔다.

 
표명렬씨는 부친의 좌익 경력에 대해 “나는 육군 정훈감으로서 공산주의 비판 전문가였다”라고 일축했다. 표씨는 “기본적으로 나는 아주 보수주의자다. 그런데 다른 쪽이 너무 극단적이다 보니 내가 마치 좌파인 것처럼 오해받고 있다”라고 말했다. 자신이 보수주의자라는 표현은 그리 과장된 것은 아닌 듯했다. 예를 들어 그는 베트남전에 대해 “평생 가장 자랑스러운 일이 베트남전에 자원한 것이었다”라고 말한다. 전기 회사(지금의 한국전력)에 다닌 부친 덕에 가정 환경은 동네에서도 꽤 유복한 편이었다. 표씨는 인터뷰 도중 ‘하느님의 뜻’이라는 표현을 몇 번 언급했는데 대령 시절이던 1985년 야간 신학 대학을 다닌 적도 있고 지금도 성당에 나간다고 한다.
평군이 내세우고 있는 주장 가운데에는 국군의날을 한국전쟁 당시 서울 수복일인 현 10월1일에서 광복군 창설 기념일인 9월17일로 옮기자는 것도 있다. 표씨는 ‘남북 제대군인 만남’ 사업도 추진하고 싶다고 말했다. “예를 들면 백마고지 전투에 참가했던 남북 생존 군인들이 현장에서 다시 만나 ‘그때 우리가 여기를 지키고 있었지. 너희들은 이 쪽으로 우리를 공격했고’하면서 회고할 수도 있다”라고 말했다.
향군은 회원이 7백50만 명에 이른다고 밝히고 있지만 그 중 준회원 6백50만 명은 제대군인·제2국민역 편입자 명단을 단순히 합친 것으로, 그들 대부분은 자기 이름이 향군에 올라있는지도 모르는 시민들이다. 평군 출범으로 재향군인회의 53년 아성이 흔들리고 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