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된 6자회담에 ‘일본’ 재 빠질라
  • 남문희 전문기자 (bulgot@sisapress.com)
  • 승인 2005.06.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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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미국, ‘라이스 구상’ 차질 빚을까 걱정


 
한반도 정세는 두 개의 바퀴로 굴러간다. 6자 회담과 남북대화다. 그런 점에서 지난 1년은 ‘바퀴 빠진 차’에 비유할 수 있다. 자력 구동을 상실하고 주변의 풍향에 표류할 수밖에 없었다.

‘6·17 김정일-정동영 회담’과 제15차 장관급회담(6월21~24일)으로 하나의 바퀴는 복원되었다. 6월23일 발표된 열두 가지 합의 사항에 따라 남북 양측은 앞으로 9월까지 ‘일용할 양식’을 확보하게 되었다.

또 하나의 바퀴인 6자 회담은? 유감스럽게도 여전히 안개 속이다. 김-정 회담에서 김위원장이 (조건부) 7월중 복귀 의사를 표명했으나 장관급회담에서 그것을 확정하지는 못했다. 6자 회담은 남북회담과 다른 선로에서 움직인다는 점이 또다시 입증된 셈이다. 그 선로는 무엇인가, 무엇이 변수인가?

라이스의 딜레마: ‘김-정 회담’ 내용이 알려진 후 세인의 관심은 콘돌리자 라이스 미국 국무장관의 이상한 반응에 쏠렸다. 한국을 방문한 힐 차관보가 6월20일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한국 외교의 효율성을 평가하면서도 “우리가 기억해야할 것은 이 모든 것이 한·미 정상회담에서 시작됐다는 것이다”라고 의미심장하게 밝힌 대로, 6·17 회담의 숨은 산파는 바로 라이스 국무장관이라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누구보다 반겼어야 할 터인데 의외로 시니컬했다. 6월19일 폭스뉴스와의 인터뷰에서 김위원장이 ‘미국의 성의’를 전제로 한 점을 겨냥해 “북한은 6자 회담에 복귀하지 않을 구실을 만들기를 좋아한다”고 꼬투리를 잡았다. 그 다음날에는 ‘휘하’에 있는 폴라 도브리안스키 국무부 차관이 북한을 또다시 ‘폭정의 전초기지’ 반열에 올려놓았다. 반기문 장관의 요청으로 부드러워지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여운을 남겼다.

왜 그랬을까. 정보소식통들 사이에는 “라이스가 김위원장의 ‘속도 위반’ 때문에 당황한 것 같다”라는 뼈있는 얘기들이 오가고 있다. 김위원장이 라이스 국무장관의 ‘선물 꾸러미’에 반응을 보인 것은 좋았지만 너무 빨리, 그리고 화끈했던 것이 아니냐는 뜻이다.
힐의 발언이 뜻하는 것 : 우선 라이스가 내놓은 선물 꾸러미부터 살펴보자. 힐 차관보의  ‘잠언’과도 같은 말의 뜻을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6월10일 한·미 정상회담의 주요 합의 사항은 북핵 불용, 평화적·외교적 해결, 북한이 핵 포기시 다자 안전보장과 에너지를 포함한 실질적 지원, 미·북간 더 나은 정상적 관계(more normal relation) 보장 등이다. 

몇 가지 눈에 띄는 대목은 있지만 전반적으로 외교적 수사에 그친 것으로 비쳤다. 그런데 사흘 뒤인 6월14일 상원 청문회에서 조지프 디트러니 국무부 대북 특사가 북측의 눈이 번쩍 뜨일 만한 얘기를 했다. 민주당 바이든 상원의원의 질문에 답하는 형식으로, 북한이 핵을 포기할 경우 인권 문제 등 다른 현안과 상관없이 ‘영구적인 안전 보장’을 해줄 수 있다고 밝힌 것이다.

북·미 교섭에서 북한이 미국에 기대하는 최대치가 바로 안전 보장이다. 그 안전 보장을 인권 문제와 상관없이 ‘영구적으로’ 해줄 수 있다니. 디트러니의 발언은 바로 한·미 정상회담에서 밝힌 ‘다자 안전보장’에 대한 자세한 해설판이자 그 직속 상관인 라이스의 생각과 의지를 대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라이스 국무장관이 지난 6월16일 ‘공은 이미 북한에 넘어갔다’고 한 것은 바로 자기가 줄 수 있는 최대치를 밝혔으니 받을지 말지 결정하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쾌속구에 직면한 김위원장이 ‘다자 안전보장도 일리가 있다’며 ‘미국이 성의를 보인다면 7월 중이라도 6자 회담에 복귀하겠다’고 하면서  되받아 던진 것이 바로 ‘6·17 회담’의 배경이다.

고이즈미 ‘8·15 자폭설’까지 나돌아

문제는 다시 고이즈미 : 그 모양새 자체는 나쁘지 않다. 문제는 시기이다. 미국은 겉으로는 7월 중에라도 빨리 복귀하라고 재촉하고 있지만, 아직 진용이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다. 고이즈미 총리의 이상한 행동 때문이다.

다시 정상회담 합의문을 보자. 북핵 포기시 ‘에너지를 포함한 실질적 지원’이라고 하지만 미국이 북한에 줄 수 있는 것은 이번에 발표한 식량 5만t처럼 인도적인 것에 국한할 가능성이 높다. 미국 의회나 행정부의 보수성이 그만큼 뿌리 깊기 때문이다.

라이스의 고민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런 상태로는 북한 진출을 둘러싼 중국과의 경쟁에서 게임이 안 된다. 중국은 이미 지난해 9월부터 북한과 고위급 회담을 거듭하며 밀월관계를 구축해왔고, 후진타오 주석의 방북을 계기로 대규모 경제 지원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높다. 미국은 그동안 북한 진출 문제에서 시간을 너무 많이 허비했고, 독자적으로는 영향력을 미칠 지렛대가 한정되어 있다.

 따라서 미국이 줄 수 있는 안전 보장과 한국과 일본의 경제 협력을 패키지로 해 중국과 영향력 게임을 벌여 가겠다는 것이 바로 라이스 구상의 요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최근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이라는 신기루를 좇았던 일본 우익의 행보에 제동을 걸어 주저앉혀 놓기도 했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그 이후로도 고이즈미의 괴상한 행보가 진정되지 않고 오히려 말기 징후마저 보이는 것이다.

현재 일본 정계와 언론계는 미국 국무부에서 불어오는 찬바람에 바짝 긴장한 상태이다. 6월 초부터 정계 원로들을 비롯해 총리의 야스쿠니 참배를 반대하는 목소리가 점점 높아져 왔다. 여기에 강경파의 선두인 아베 신조를 ‘왕따’하는 분위기마저 형성되고 있다. 미국 국무부 관계자들이 일본 언론이나 정계 인사들에게 ‘아베는 능력이 없다’는 말을 지속적으로해줌으로써 바람이 부는 방향을 알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이즈미는 꺾일 줄을 모른다. 마치 ‘하리키리’(할복)를 앞둔 사무라이의 처연함마저 느끼게 한다. 일본 정가에는 고이즈미가 ‘종전 기념일인 8월15일 야스쿠니를 전격 참배하고 총리 직에서 물러난다’는 ‘8·15 자폭설’이 유력하게 나돌고 있을 정도다. 그 개인의 의지라기보다는 우익에 발목이 잡힌 상태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는 얘기까지 나오고 있다.

고이즈미의 행보가 종착역을 향해 치달을 8·15까지 자칫하면 6자 회담을 열 만한 국제 환경이 조성되지 못하거나, 최악의 경우 일본을 빼는 수밖에 없다는 얘기로도 비화할 수 있다. 이미 북한은 일본의 6자 회담 참석을 비토하겠다는 뜻을 계속해서 밝혀왔다. 중국 역시 완강하다. 고이즈미와는 대화하지 않겠다는 뜻을 굳힌 채, 미국에도 고이즈미를 감싸지 말라는 뜻을 강하게 피력하고 있다고 한다. 심지어 이런 판국에 무슨 6자 회담이냐는 속내를 내비치고 있기도 하다.

일본을 둘러싼 이같은 복잡한 사정으로 인해 라이스 국무장관은 내심 8·15에 한 차례 폭풍우가 몰아친 이후에나 회담을 여는 것이 차라리 낫다고 생각해 왔다고 한다.  즉 8월 말에서 9월 초 정도이다. 그런데 김정일 위원장이 7월 중에라도 복귀하겠다고 치고 나오자 또다시 골치가 지끈거리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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