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도라도’에서 ‘엘도라도’ 꿈꾼다
  • 진창욱 (해외편집위원 ·발렌시아) ()
  • 승인 2005.05.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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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립 100주년 맞은 라스베이거스/도박에서 컨벤션 산업으로 ‘진화’ 거듭

 
미국 캘리포니아 주 발렌시아에 살고 있는 식당 종업원 토냐 헛슨은 지난 4월 라스베이거스에 가서 20 달러를 딴 것이 너무나 기뻐 자랑이 늘어졌다. 슬로트 머신과 다섯 시간 이상을 싸우다시피 해서 생긴 과욋돈이라 더 기분이 좋았다. 그녀는 다음 번 휴가가 시작되면 또 라스베이거스에 갈 생각이다.

토냐가 남편과 함께 라스베이거스에 가서 2박3일 동안 쓴 돈은 1천 달러가 넘었다. 호텔 숙박비와 식사비, 쇼 관람권 구입, 쇼핑 등에 든 경비다. 도박에서 잃은 돈이 없어 그 정도다. 라스베이거스가 생긴 지 1백년 만에 주민 수 8백명이던 오지 마을에서 오늘날 인구 2백만명을 헤아리는 대도시로 탈바꿈하고, 해마다 4천만명 가까이 관광객을 불러 모으는 세계적인 명소로 각광받게 한 경영 전략이 바로 이같은 ‘20 달러 서비스’다.

라스베이거스는 오는 5월15일 탄생 1백주년 기념일을 맞는다. 기네스북 기록을 예약한 상태인 58.5t짜리 사상 최대 생일 케이크를 선보이고, 텔레비전과 라디오로 전세계에 생중계할 헬도라도 퍼레이드를 대대적으로 준비하고 있다. 정초부터 시작된 100주년 기념 행사는 올해 내내 각종 이벤트 형식으로 이어진다. 5울14일 헬도라도 퍼레이드와 이튿날 있을 공식 기념 행사는 이번 1백 주년 행사의 결정판이 될 것이다. 헬도라도 퍼레이드는 1944년부터 시작한 이 도시의 명물 축제이다.

라스베이거스 설립 1백 주년 행사는 세계 도박 산업의 메카로 부르는 라스베이거스의 도박 역사 75주년과는 다른 의미를 갖는다. 도시 확장의 역사가 도박 산업 번창의 역사와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초원’을 뜻하는 스페인어에서 이름을 따온 라스베이거스는 1905년 5월15일 이 곳을 지나가는 철로를 건설한 철도회사가 110 에어커의 땅을 경매에 부치면서 역사가 시작되었다. 이후 25년간 별다른 특색이 없었던 라스베이거스가 급성장한 것은 대공황기인 1931년 인근 후버댐의 공사 착공, 네바다주의 도박 합법화, 그리고 이혼 조건 완화 등 특색 있는 조처들로 주변 환경과 정책이 어우러진 결과다.

세계적 대역사였던 후버댐 공사는 수많은 노동력을 라스베이거스로 끌어모았고 이로 인한 시 인구의 급증을 불렀다. 이혼 조건 완화 조처는 하루 빨리 배우자와 결별하려는 다른 주의 수많은 부부들을 불러들였다. 이에 덧붙여 몇 날 낮밤을 도박으로 지새워도 누구 한 사람 손가락질 하지 않고, 경찰이 잡아가지도 않는 도박 해방구가 형성되면서 라스베이거스는 급팽창의 길에 올랐다.

오늘날 라스베이거스를 찾는 관광객들에게 빼놓을 수 없는 관광 코스인 휘황찬란한 네온 불빛이 번쩍이는 야간 도심 관광, 에너지 대량 소비의 주범인 대형 호텔 시설과 도박장, 24시간 불을 밝히며 손님을 유혹하는 대형 쇼 무대는 모두 후버댐 발전소가 있어서 가능했다. 돈벼락을 맞을 기회를 누구에게나 제공하고, 요행수를 꿈꾸는 인간 내면에 숨은 사행심을 마음껏 발산할 수 있게 만든 ‘무대 장치’는 해마다 더 많은 발걸음을 라스베이거스로 재촉하게 하는 요소다.

객실 수 5천개가 넘는 라스베이거스의 세계 최대 호텔 MGM 그랜드 호텔이나, 그 다음으로 규모가 큰 미라지 호텔 또는 트레저아일랜드(보물섬) 호텔의 도박장은 근엄한 종교인이나 도덕 군자들에게는 사악함이 가득한 악귀의 소굴로 보일 정도다. 남녀 구분 없이 슬로트 머신에 매달리는 이들의 얼굴 표정은 결코 온화하거나 평온하지 않다.

‘게이밍 도시’로 급속 탈바꿈

그들의 얼굴에는 내면에서 우러난 사행 심리가 어두침침한 실내의 붉고 푸른 조명에 반사되어 귀기와 같은 섬뜩함이 서리기도 한다. 이들이 쉴새 없이 집어넣는 동전은 수백 달러 심지어 수천 달러에 이른다. 호주머니가 털리고 마침내 신용 카드 사용액마저 한도에 이르면, 이들은 금방이라도 다가올 듯한 재폿 기회에 대한 아쉬움을 안고 각자 자기 방으로 향한다.

이들은 적지 않은 돈을 다 털리고도 억울해 하지 않고, 자신이 도박에 손을 댔다는 죄의식이나 도덕점 부담감마저 느끼지 않는다. 오로지 하룻밤을 스릴 넘치게 즐겼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라스베이거스를 ‘해방 시’라고 부르는 것은 이같은 정신적·도덕적 자유가 넘칠 정도로 보장되기 때문이다.

 
매년 이 도시가 거행하는 퍼레이드 행사에 ‘헬도라도’라는 이름이 붙은 것도 우연이 아니다. 황금 벼락이 쏟아지는 개척자들의 이상향 ‘엘도라도’에, 지옥을 뜻하는 영어 단어 ‘헬(hell)'을 덮어씌운 합성어라는 사실을 안다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라스베이거스는 도박으로 세계적 명소가 되고, 도박이 이 도시의 정체성을 형성했다. 그러나 오늘날 라스베이거스를 여전히 도박의 도시라고만 인식한다면 시대 착오이다. 우선 이번 1백 주년 기념 행사에서도 초점은 도박이 아니다.

 라스베이거스를 찾는 전체 관광객 3천8백 만명 가운데 성인은 3천4백만명이다. 이중 13%에 이르는 4백40만명은 결코 도박을 하지 않는다. 비록 도박사들의 베팅 대상이 되기는 하지만, 국제적인 스포츠 경기도 이곳에서 수시로 열린다.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리는 각종 회의나 박람회 등 컨벤션 이벤트가 한해 2만3천 건에 이르고, 이같은 행사에 참가하는 방문자 수가 5백70만명에 이른다.

각종 회의와 전시 공간의 면적이 9백만 평방 피트(25만 평)에 이른다면, 라스베이거스는 이제 ‘컨벤션 도시’라고 고쳐불러야 마땅하다. 이 외에도 영화 산업 관련 행사와 세계적인 패션 쇼, 각종 공연과 미술 전시 등 예술 시장의 규모도 로스앤젤레스를 능가한다. 라스베이거스가 1백주년을 맞아 시도하려는 것도 바로 이런 것에 대한 강조다. 라스베이거스 스스로 더 이상 ‘도박의 도시’가 아닌 ‘종합 엔터테인먼트 도시’로 나아가려고 몸부림치는 것이다.

라스베이거스의 변신은 미국 전체가 사실상 거대한 도박의 나라나 다름 없이 된 것과 무관치 않다. 현재 미국 50개 주 가운데 하와이 등 2개 주를 뺀 48개 주가 카지노 등 도박을 허용하고 있다. 카지노를 허가하지 않을 경우, 최소한 로또라도 허용하고 있다. 라스베이거스가 다른 도박 도시나 도박이 허용되는 다른 도시와 경쟁해 생존하고 현재 수준의 번영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차별화와 변신이 유일한 돌파구라는 공감대가 깔려 있는 것이다. 라스베이거스가 최근 들어와 팽창세에 더욱 더 박차를 가하고 있는 원동력도 바로 이같은 변신이다.

라스베이거스 시는 오는 2007년 방문객 수가 4천3백만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매년 한국 전체 인구가 라스베이거스를 방문하는 꼴이다. 라스베이거스에서 발견할 수 있는 또 다른 변화는 도박에 대한 인식과 개념이 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라스베이거스의 슬로트 머신이나 카지노는 이제 더 이상 도박으로 부르지 않는다. 일종의 경기라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갬블링’에서 ‘게이밍’으로의 변화다. 갬블링이라는 부정적 이미지가 게이밍이라는 당당한 이름으로 산업화의 길을 열고 있는 것이다. 게이밍 산업화의 전략이 바로 토냐 헛슨과 같은 평범한 미국인 고객에게 선사하는 ‘20 달러 서비스’다. 큰 돈 쓰면서 작은 행복을 보상받기 위해 고객 스스로 찾아오게 만드는 전략이다.

라스베이거스 100주년에서 한국이 배워야할 것도 한가지 있다. 한 도시의 형성·성장·팽창은 우격다짐이 아니고, 이처럼 서로서로의 필요와 수용에 의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루어져야 지속 가능하다는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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