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이불요’의 힘
  • 배병삼 (영산대 교수· 정치학) ()
  • 승인 2005.04.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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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싱가포르 전 총리의 이름 리콴유를 이광요(李光耀)라고 부를 때니까 꽤 오래 전 일이다. 서당에서 한문을 배울 때였는데, 그 이름이 적이 상스럽게 읽혔다. ‘빛날 광’자만 해도 환한데 요(耀)자마저 ‘빛나다’라는 뜻이니 그야말로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우리라면 이런 식으로 이름을 짓진 않을 텐데’ 하는 미진한 느낌이 마음이 남았다.

그러던 참에 <도덕경>을 읽는데 그 속에서 광이불요(光而不耀)라는 말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는 ‘빛나되 번질거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제야 광-요라는 이름에 담긴 깊고 지혜로운 뜻이 사람의 무릎을 치게 했다. 그 이름은 빛나고 또 빛난다는 단순 무식한 뜻이 아니라, 빛나되 그것을 오래도록 유지하려는 ‘자기 부정’의 곡절이 깃들어있는 이름이었다.   

활활 빛을 내고 스러지는 것이야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허나 빛을 오래도록 유지하는 일은 쉽지 않다. 그건 빛을 확 토해 내버리지 않고, 속으로 머금고서 스스로를 변형시키는 과정을 통할 때라야만 가능한 일이다. 마치 숯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빛나되 번질거리지 않는다는 말 속에는 벌써 진정한 힘은 홑이 아니라 겹으로 짜인다는 웅숭깊은 성찰이 숨어있다.

힘의 속성과 매력의 가치 제대로 이해해야


이를테면 국력이란 군사력· 경제력과 같이 눈에 드러나는 힘만이 아니라 그것을 유지하게 만드는 문화의 힘, 이른바 소프트파워가 함께할 때만이 제대로 갖춘 것이 된다. 군사력이 밖으로 발휘하는 힘이라는 점에서 빛(光)에 견줄 수 있다면, 문화는 속으로 온축하는 힘이니 ‘번질거리는 않는 빛’(不耀)에 해당할 것이다.

요컨대 힘이란 보통 생각하듯 강제력만이 아니라 끌어들이는 힘, 곧 매력과 더불어 겹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우리는 힘의 두 요소를 잊지 않았다. 17세기 병자호란을 겪은 다음 절치부심 북벌(北伐)의 칼을 가는 순간조차도 그러했다. 가령 백호 윤휴는 “문화와 무력은 임금의 두 수단이다. 문화는 날줄과 같고 무력은 씨줄과 같다”(만필, 상)라고 지적한 바 있다.  

그런데 둘 중에서도 특별히 문화의 힘, 매력을 중시했던 것이 동양정치학의 특징이다. 유교 정치사상을 덕치(德治)라 부르는 까닭은 사양과 겸손을 통해 매력이 형성되고, 이에 따라 정치적 평화를 획득할 수 있다는 비전 때문이다.

이에 반해 근대 서양에서는 강제력만을 힘으로 여겨 군사력과 경제력으로 국력을 재고 또 비교했었다. 이런 생각 아래에 남는 것이라곤 나라간 전쟁과 빈부의 격차일 뿐이다.

흥미로운 것은 서양 정치학도 이제야 매력을 발견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하버드 대학의 조셉 나이 교수는 최근 이라크 전쟁을 통해 미국이 얻은 것은 경제력(석유 자원)이지만, 거의 홀로 전쟁을 끌어가면서 잃어버린 것은 문화적 매력, 즉 소프트파워라고 지적한다(따라서 소프트파워를 ‘매력’이라고 번역한 것은 적절하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힘이 두 겹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생각의 폭이다. 지금 우리는 마치 깡통처럼 얇고 단순하다. ‘친일’ 발언을 했다고 가수 조영남씨를 처리하는(?) 잔인한 방식을 보면 물밑이 환하다. 고스톱을 그렇게들 좋아하면서 왜 포커페이스(속뜻을 감추는 표정 관리)라는 단순한 지혜조차 발휘하지 못하는지 모를 일이다. 

둘째는 매력(끌어들이는 힘)의 가치를 더 잘 이해하는 일이다. 매력의 서식지는 선명한 땡볕 아래가 아니라 애매모호하고 ‘아리까리한’ 점이지대다. 한 철학자가 잘 지적했듯 “매력이란 목적 의식이 희박한 자에게서 풍기는 희미한 신비와 같은 것”(김형효)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우리 대통령의 날카롭고 선명한, -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닌 발언들은 덜 매력적이다. 

점점 한반도 주변에 파고가 높아져가는 상황에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미덕은, 좋아하되 그 나쁜 점을 알고, 미워하되 그 아름다움을 함께 아는(‘대학’) 겹눈의 지혜, 또는 빛나되 번질거리지 않는 속 깊은 자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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