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벌 싸움이 쇼트트랙 죽이네
  • 정충희(KBS 기자) ()
  • 승인 2005.04.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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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선수 입촌 거부 주요 원인…“회장 자리·적립금 놓고 이전투구”

 
지난해 여자 국가대표 선수들에 대한 코치들의 구타 문제로 홍역을 치렀던 쇼트트랙이 이번에는 남자 국가대표 선수들의 입촌 거부로 다시 한 번 큰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쇼트트랙 국가대표 선수들이 태릉선수촌에 입촌하는 날이었던 지난 4월10일, 남자 국가대표 선수 8명 가운데 7명이 선수촌에 들어가지 않았다. 대신 부모들을 대동하고 기자회견을 열어 입촌할 수 없다고 밝혔다.

최근 감독으로 선임된 김기훈씨의 지도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이 선수들의 주장이었다. 선수들은 김기훈 감독이 지난해 국가대표 감독을 맡았을 때 특정 선수를 위해 다른 선수들의 희생을 강요했다고 말했다. 한마디로 편애가 심했다는 것이다. 지난해 김기훈 감독이 특정 장비 착용을 강요했다는 이유로 경질되었던 전력도 문제가 되었다.

빙상연맹은 지난해 김기훈 감독이 자기 아버지 회사의 스케이트화를 신도록 강요했다는 이유로 김기훈 감독을 경질했다. 문제는 당시 경질에 결정적인 자료가 된 자술서를 쓴 선수 3명이 이번에 국가대표로 뽑혔다는 사실이다. 이들 3명은 자신들이 불이익을 당하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고 말했다.

진학·대표 선발 둘러싼 뇌물 수수 의혹 불거져

 
빙상연맹은 부랴부랴 진상조사위원회를 구성했고, 선수들에게는 대한체육회 국가대표 훈련 규정에 따라 3일 이내에 입촌하라고 통보했다. 4월13일 오후 4시30분 선수 7명이 선수촌에 입촌하자 파문은 일단 봉합되는 듯했다.

그러나 입촌 직후 갈등은 다시 불거졌다. 선수들은 연맹이 진상 조사 기간에는 김기훈 감독이 선수촌에서 나가 있도록 하겠다는 입촌 조건 합의 사항을 지키지 않고 있다고 주장했다. 연맹은 지도자 없는 대표팀 구성과 훈련은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 체육회의 방침이라고 맞섰다. 이를 두고 연맹과 선수들 사이에 한바탕 소동이 벌어진 것이다. 입촌 시각은 오후 4시30분, 합의 이행을 둘러싼 논란이 벌어진 것은 저녁 8시. 불과 3시간30분 만이다. 자정까지도 합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결국 체육회는 쇼트트랙 남자 대표팀의 정상적인 훈련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렸고 4월14일 오전 감독과 코치, 선수 8명 모두에게 퇴촌을 통보했다. 진상 조사가 끝나고 조사 결과와 후속 대책이 나올 때까지 남자 대표팀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 상황을 맞은 것이다. 연맹은 빠른 시일 내에 조사를 마치고 대책을 내놓겠다고 하지만 갈등의 심각성을 고려하면 문제 해결은 쉽지 않아 보인다.

“지도자가 금메달 양보하라고 강요했다”

 
이번 파문의 이면에는 뿌리 깊은 파벌 싸움이 있다고 말하는 빙상인이 많다. 선수 7명과 김기훈 감독의 갈등은 외형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실제로 취재를 하다 보면 이러한 말이 터무니없는 주장은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게 된다. 공식 인터뷰에서는 표현하지 않지만, 카메라 전원을 끄고 나면 쉴 새 없이 비리 의혹을 제기한다. ‘L이라는 특정 인물이 자기 인맥을 국가대표 코칭 스태프로 만들기 위해 부당한 압력을 행사했다.

ㄴ은 특정 선수에게 태극마크를 달아주는 조건으로 특정 학교 입학을 요구했다. 어떤 두 지도자는 선수촌에 들어가기 위해 앙숙이던 ㄴ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또 다른 한 지도자는 ㄴ과 절친한 특정 선수의 어머니에게 코치가 되도록 도와달라고 청탁했다고 주장했다.

진학과 대표 선수 선발을 둘러싼 뇌물 수수 의혹도 제기했다. 다른 쪽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입촌 거부에는 ㄷ이라는 배후 인물이 있다. ㄷ은 특정 학교를 기반으로 한 파벌의 중심 인물로, 대표선발전에서 승부 담합 방식으로 실력이 부족한 자기 쪽 선수에게 태극마크를 달아주었다. ㄷ과 가까운 전직 지도자는 연습 기록을 무시하고 자기 쪽 선수들에게만 국제 대회 출전 기회를 주었고, 자기와 다른 쪽 선수들에게는 금메달 양보를 강요했다. 이를 거부하면 폭행까지 했다’고 맞섰다.

이들 역시 ㄷ이 국가대표와 진학을 거래한다는 주장을 했다. 정치인들의 폭로전 못지 않다. 이러한 행태를 비판하는 한 인사는, ㄴ과 ㄷ 가운데 한 명이 사라져야 싸움이 끝난다는 극언까지 서슴지 않았다. 극단적이고 비합리적인 표현이지만 이른바 파벌 싸움의 심각성을 미루어 짐작케 하는 발언이다.

이러한 폭로의 사실 여부는 지금으로서는 확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국내 대회는 물론 국제 대회에서도 이른바 ‘밀어주기’는 하나의 팀 전술로까지 인식되는 공공연한 관행이었다는 점에서 양측 모두 승부 담합 의혹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과거를 가지고 있다.

한 선수 부모의 증언을 들어보자. 예를 들어 실력이 좋은 ㄱ이 금메달이 유력하면 다른 선수는 ㄱ의 도우미가 되어 자신을 포기했다고 한다. ㄱ이 가장 잘 하지만 ㄱ은 병역 문제를 해결해야 할 특정 선수를 위해 양보를 강요받기도 했다고 한다. 어느 파벌에 속한 지도자가 국가대표 감독이 되느냐에 따라서 손해를 보는 선수들이 달라질 뿐 모든 선수가 피해자라는 주장이다.

모든 선수들이 피해자라고 생각할 여지를 어른들이 주어온 것이다. 그 어른들이 특정 파벌로 양분되어 싸우는 사이 어린 선수들의 가슴이 멍들고 한국 쇼트트랙은 몰락하고 있다고 전 국가대표 선수의 아버지는 주장한다.

빙상연맹의 한 관계자는 연맹의 자체 적립금이 30억원에 육박했다는 말이 나오면서 파벌 싸움이 격심해졌다고 말했다. 앞으로 빙상연맹을 맡고 있는 특정 기업이 떠날 경우 이 적립금을 차지하기 위한 힘겨루기라고 말했다. 입촌 거부 사건의 진원지에서 노리는 것은 현 회장의 퇴진이라는 말도 했다.

결국 회장 자리와 그에 따르는 거액의 적립금이 이번 사건을 근본적으로 규정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입증하기 어려운 말이지만, 이번 사건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국가대표 선발과 감독 선임을 문제 삼아 회장 퇴진 주장이 공공연히 나왔다는 사실은 이러한 주장에도 귀를 기울이게 하는 대목이다.

국내 대회든, 대표 선발전이든, 대표팀 연습 경기든 투명하고 공정한 게임의 룰이 지켜질 수 있도록 보장하는 것이 절실하다. 실력대로 결과가 나오도록 보장해야 할 의무는 1차적으로는 빙상연맹의 몫이다. 그러나 이러한 공정한 규칙이 뿌리 내리기 위해서는 뿌리 깊은 파벌 싸움을 중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뜻 있는 빙상인들 사이에서 힘을 얻어가고 있다.

1년도 남지 않은 겨울 올림픽 금메달을 위해서가 아니라, 어린 선수들의 멍든 가슴을 치유하고 희망을 안겨주기 위함이다. 어린 선수들이 희망을 갖지 못하고 어른들의 이전투구에 휩쓸린다면 세계 최강 한국 쇼트트랙은 몰락의 길을 걸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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