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멀미’에 넋 잃고 봄빛에 눈 멀고…
  • 오윤현 기자 (noma@sisapress.com)
  • 승인 2005.04.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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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동백 만개한 거문도 ‘봄맞이’ 기행

 
봄은 ‘완행’이다. 봄꽃의 대명사 개나리를 보라. 제주도에서 꽃망울을 터뜨린 개나리는 보통 보름 뒤에 서울에서 꽃을 피운다. 제주에서 서울까지의 직선 거리는 4백40km. 그러니까 봄은 1시간에 약 1.2km 하루에 약 29.3km씩 북진하는 것이다. 빗대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 속도를 어린아이가 아장아장 걷는 걸음이나 늙은 당나귀 걸음에 비유한다.

올해에도 봄은 굼뜨기만 하다. 기상청에 따르면, 3월16일 서귀포에서 꽃망울을 터뜨린 개나리가 서울에서는 3월30일에 만개한다. ‘꽃 바다’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에게 느린 봄은 야속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파란 눈으로 웃음 짓는’ 봄을 조금 더 일찍 만날 수 없을까. 방법은 하나, 멀리 봄 마중을 나가면 된다. 목적지는 남도, 한겨울에도 동백꽃이 싱긋빙긋 웃는다는 거문도가 제격이다.

오누이처럼 어울린 유채밭과 동백숲

 
늘 봄기운을 머금고 있다는 거문도로 가는 길은 멀고 아득했다. 쾌속선 ‘오가고호’를 타고도 한 시간이 넘어서야 닿았으니까. 오전 9시17분. 섬은 외부인을 경계하듯 젖빛 해무에 뿌옇게 가려 있었다. 섬은 옛 이름 삼도(三島)답게 크고 작은 섬 3개로 구성되어 있었다. 여객선 터미널과 (삼산)면사무소가 있는 고도, 귤은사당이 있는 동도, 우리 나라에서 최고(最古)의 거문도등대가 있는 서도가 그것이다. 
영화 세트 같은 동도 거리를 벗어나자 곧바로 동백나무와 상록수로 뒤덮인 짙푸른 언덕이다. 나무들은 봄바람에 ‘스스샤샤샤’ 소리를 내며 가볍게 흔들렸다. 아이들 소리가 드높은 삼산초등학교 앞을 지나 조금 더 오르자 그곳에도 온통 동백나무다. 나무에는 숯불같이 새빨간 꽃들이 다닥다닥 매달려 있었다. 너른 벌 위에 펼쳐져 있는 노란 유채와 동백숲은 여동생과 수줍은 오빠처럼 잘 어울렸다.

 
곧이어 영국군 묘지. 1885년, 영국군은 러시아의 남진을 막고자 거문도항을 무단 점령했다. 그리고 이곳의 이름을 해밀턴 항으로 바꾼 뒤 2년 동안 진주했다. 봄이 두 번 오는 동안 거문도 주위에서 사망한 영국군 병사는 모두 9명. 그 가운데 2명의 무덤이 남아 있다. 오래된 나무 십자가와 돌비석 주위에도 핏빛 동백꽃이 처연하게 피고지고 있었다. 돌아 나오는 길에 만나는 동백꽃들은 조금 전과 다른 모습이었다. 짙푸른 바다와 어우러져 붉은 때깔이 더욱 선연히 빛났던 것이다.

거문도 동백꽃들은 서도의 수월산(196m)에서 더 새뜻하게 빛을 발한다. 거문도에 두 대밖에 없다는 봉고 택시를 타고 해안가를 달리면 금세 수월산에 닿는다. 산은 특이하게도 초입이 동백나무 터널로 되어 있다. 터널 안은 침침했는데,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자 곱디고운 동백꽃들이 하나둘 눈에 들어왔다. 바닥에는 ‘눈물처럼 후드득’ 떨어진 동백꽃들이 처연히 엎어져 있다. 하늘을 가린 동백나무들은 생김새가 제멋대로였다. 어떤 놈은 뒤틀리고, 어떤 놈은 거꾸로 자라겠다는 듯 밑동보다 위쪽이 더 굵직했다.

 
터널을 다 올라가자 ‘거문도등대 0.9km’라는 팻말이 나왔다. 거기에서부터 길은 산허리를 가로지른다. 바닥에는 기왓장같이 납작한 돌들이 깔려 있고, 좌우에는 동백나무와 다정큼나무·생달나무·예덕나무·돈나무·검팽나무같이 뭍에서는 생전 듣지도 보지도 못한 나무들이 뒤섞여 있었다. 숲은 길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길을 잃을 정도로 어둡고 빽빽했다. 간혹 직박구리와 동박새(동백꽃의 꿀을 빨아먹는 대신 꽃가루를 옮기는 새)들이 쫓고 쫓기는지 요란한 새소리가 숲을 뒤흔들었다.

오른쪽 산비탈 아래로는 짙푸른 바다와 기암절벽이다. 바다는 눈의 높이를 다르게 할 때마다 카멜레온처럼 색깔을 바꾸었다. 그리고 낙화한 동백꽃을 주워 먹으려는 듯 끊임없이 파도를 날름거렸다. 왼쪽 비탈에 선 동백나무들은 멍석딸기 같은 꽃들을 늘어뜨려 지나는 사람들의 이마를 툭툭 건드렸다.

100년 역사 마감 앞둔 거문도등대

산모롱이를 몇 개 더 돌아서자 대리석으로 만든 듯한 거문도등대와 그 옆에 서 있는 관백정(觀白亭)이 돌연 눈앞에 나타난다. 거문도등대는 우리 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등대다. 1905년 불을 밝힌 뒤 꼬박 100년 동안 거문도 동백꽃이 피고 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렇지만 등대는 지금도 일몰 시간과 일출 시간에 점등과 소등을 반복한다. 그 빛도 변함이 없다. 100년째 43km(23마일) 해역까지 빛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등대는 곧 퇴역할 예정이다. 내년에 높이 33m짜리 새 등대가 바로 옆에 생기기 때문이다.

관백정 오르면 ‘바다의 금강산’ 백도가 한눈에

 
관백정은 바위섬 36개로 이루어진 백도를 보기 위해 지어진 정자이다. ‘바다의 금강산’이라 불리는 백도와 거문도 사이의 거리는 약 70리. 하늘이 쾌청한 날에는 관백정에서 백도가 빤히 바라다보인다. 어디 그뿐인가, 멀리 60km 남짓 떨어진 한라산까지 보인다(거문도는 여수와 제주도 중간쯤에 있다).
초봄은 관백정 밑에서 절정을 이루고 있었다. 해안 절벽에 야생 수선화가 봄나들이 나온 가족처럼 다소곳이 서서 해바라기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수선화는 향이 어찌나 짙은지 코가 알싸할 정도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올 연말까지는 거문도등대와 관백정을 제대로 볼 수가 없다. 새 등대를 짓는 공사가 한창이어서 출입을 금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거문도는 꽃 소식이 궁금하거나 봄 향기가 그리워 찾아온 사람을 실망시키지 않는다. 그만큼 거문도는 곳곳에 다양한 볼거리를 감추어 놓고 있다. 누군가 수월산 ‘동백꽃 길’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 길은 내가 걸어본 길 가운데 가장 아름답다!” 그곳에 사는 사람에게도 아름다움은 같은 느낌으로 다가오는 모양이다. 거문도등대 한병남 관리소장은 “3월 중순이 되면 숫제 꽃멀미가 날 정도다”라며, 성미 급한 상춘객을 유혹했다.

가는 길:여수 여객선터미널이나 고흥 녹동항에서 쾌속선을 타면 된다. 여수에서 1시간50분, 녹동항에서 1시간 걸린다. 출항 시간은 7시40분·3시(여수발), 08시·14시(녹동발)이다. 백도는 거문도에서 따로 배를 타야 한다. 

 
꽃들은 거문도에서만 피고 지는 게 아니다. 춘삼월이 되면 남쪽의 수많은 섬들과 뭍에서도 고개를 내민다. 여수 돌산도는 갓김치로도 유명하지만 향일암의 동백꽃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기암 사이에 서 있는 동백나무들은 수백 살쯤 되었는지 모두 다 우람하다. 그러나 겨울 몸살 때문인지 나무들은 드문드문 꽃을 피우고 있다. 꽃들은 크고 선연했다. 향일암 관계자에 따르면, 주렁주렁 매달린 꽃봉오리들은 3월10일쯤 불꽃처럼 만개한다.

향일암 오르는 계단에서 만나는 낙화와, 대웅전 앞에서 보는 탁 트인 쪽빛 바다도 장관이다. 아, 그 전에 향일암 아래 임포항에서 그 유명한 갓김치와 삶은 홍합과 굴구이를 꼭 맛보시기를. 맛난 음식은 여행의 또 다른 재미를 선사하니까.

전남 강진 만덕산 백련사 주변도 동백나무 천지이다. 무려 7천 그루가 절집을 감싸고 있다. 이곳의 나무들은 혼신의 힘을 다해 붉은 꽃을 피워낸다. 월간 <사람과 산> 김남곤 기자에 따르면, 백련사 동백림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보려면 아침 나절에 들러야 한다. 우거진 숲을 비집고 들어온 아침 햇살이 낙화한 동백꽃을 더욱 핏빛으로 물들이기 때문이다. 백련사에서는 정약용 선생이 유배 생활을 했다는 다산초당이 가깝다.

해남 달마산에 단아하면서도 도도하게 서 있는 미황사는 아름다운 절이다. 건물만이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절로 오르는 길도 동백나무 때문에 운치가 그윽하다. 삼월이면 이곳 나무들에도 붉은 물이 뚝뚝 든다. 1754년에 중수되었다는 이곳의 대웅보전은 보물 제947호로 지정되어 있다. 재미있는 것은 대웅전 기둥의 주춧돌이다. 특이하게도 자연석에 연잎과 연봉을 새겨 놓은 다음, 게와 거북이까지 조각해 넣었다.

10분쯤 떨어진 부도밭으로 가는 오솔길도 아름답다. 동백나무 사이로 난 길에서는 시를 중얼거려도 좋고, 작은 소리로 동요를 흥얼거려도 좋을 듯싶다. 부도밭에는 2백~3백년 된 부도 27기가 모여 있는데, 모양도 모양이지만 부조가 볼 만하다. 게와 거북이뿐만 아니라 물오리·다람쥐·물오리·가재, 심지어 방아 찧는 토끼까지 그려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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