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옹지마’ 하이트 주류 시장 평정하나
  • 안은주 기자 (anjoo@sisapress.com)
  • 승인 2005.04.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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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로 우선협상자로 선정돼 업계 최강자 도약 눈앞에

 
13년 전으로 돌아가 보자. 당시 진로그룹은 마흔 살인 젊은 2세 경영자 장진호 회장의 공격적인 경영으로 재계의 눈길을 한몸에 받고 있었다. 1988년 경영권을 이어받은 장회장은 ‘탈주류화’를 선언하며 경영 다각화에 박차를 가했다. 장회장은 또 창업주의 ‘신길동 시대’를 마감하고, ‘위대한 서초동 시대’ 개막을 주창하며 서초동 일대 3만평 부지에 진로타운을 건설하고 있었다. 그와 함께 진로쿠어스를 설립해 맥주 시장에도 뛰어들 채비를 하고 있었다. 종업원은 6천명이 넘고 그룹 매출액은 1조2천억원이 넘어, 장회장 취임 당시 재계 순위 47위였던 진로그룹은 이 무렵 30위 권으로 진입했다.
   

반대로 하이트맥주의 전신인 조선맥주(주)는 1992년 당시 언제 회사가 문을 닫을지 모르는 위기감에 빠져 있었다. 박문덕 현 회장이 대표이사 사장으로 취임한 지 1년이 채 안 된 시점이었다. 조선맥주는 경쟁사인 OB맥주의 공세에 밀려 30%를 유지하던 맥주 시장 점유율이 20%대로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게다가 도매 시장에서 막강한 유통망을 갖고 있는 진로가 맥주 시장에 뛰어들 채비를 하고 있어 초긴장 상태였다. 몇몇 직원은 이미 진로의 스카우트 제의를 받고 회사를 떠난 뒤였다. 당시 조선맥주는 계열사를 합해도 종업원이 1천3백명밖에 안되었고, 순매출액도 1천9백53억원밖에 되지 않았다.
   
그로부터 13년이 흐른 지금 두 기업의 운명은 극적으로 뒤바뀌었다. 사명을 하이트맥주로 바꾼 조선맥주는 13년 전 감히 넘보지도 못했던  진로를 통째로 삼킬 절호의 기회를 잡았다. 법정관리 기업인 진로의 우선 매각 협상자로 선정된 것이다. 진로를 인수할 경우 하이트맥주는 초대형 주류 기업으로 탈바꿈하게 되고, 진로는 주류종합기업 하이트의 ‘양자’ 처지가 된다.
 
 
지난 10여 년 동안 진로와 하이트맥주에서 무슨 일이 있었기에 운명이 이처럼 희극과 비극으로 엇갈린 것일까. 10여 년 전, 두 기업의 최고경영자 장진호 회장과 박문덕 대표이사는 모두 2세 경영자로서, 선대의 그늘에서 벗어나고 싶어했다. 그러나 그 방법은 전혀 달랐다. 
진로의 장회장은 소주 사업만으로는 우량 기업이 될 수 없다며 ‘탈 주류, 사업 다각화’로 승부수를 띄웠다. 취임 첫해 진로유통센터를 개장한 것을 시작으로 연합전선·조선신약 등을 인수했고, 건설업에도 뛰어들었다. 취임 당시 15개였던 진로 계열사는 장회장 취임 3년 만에 23개로 늘어났다. 물론 ‘총알’은 그룹 매출의 25%를 차지하던 진로소주가 대부분 맡았다. 1997년 진로그룹이 무너지기 전까지 진로소주가 출자금·대여금·지급보증 명목으로 계열사에 지원한 자금 규모는 모두 2조1천억원이 넘었다.

1990년대 초·중반 진로는 문어발처럼 사업을 다각화하고 확장했지만, 계열사의 경영 성과는 지지부진했다. 이 와중에 장회장은 이복형 장봉용씨와 경영권 다툼을 벌였다. 그리고 분쟁을 마무리하는 대가로 ‘알짜배기’ 진로식품을 이복형에게 넘겨주었다. 장회장이 끌어안은 나머지 계열사는 계속 부진하면서 진로그룹은 자금 사정이 급격히 악화했고, 1997년 결국 주저앉고 말았다.

반대로 조선맥주를 진두지휘한 박문덕 대표이사는 장회장과 달리 ‘주류 종합 기업’이라는 청사진을 제시하며 온고지신(溫故知新) 전략을 폈다. 주류사업이라는 한 우물을 파되, 무기를 바꾸었다. 만년 2등 상품이자 오랫동안 안정적 수입원 노릇을 하던 크라운맥주를 버리고, 신제품 하이트를 출시한 것이다. 박대표로서는 회심의 승부수였다.

박대표는 핵심 직원들을 모아 신제품 개발팀을 꾸리고, 밤을 새워가며 수십 가지 새로운 맥주를 만들었다. 그리고 1년 뒤인 1993년 5월 하이트를 세상에 내놓았다. 당시 조선맥주가 비빌 언덕이란 제품력과 ‘더 이상 무너지면 끝장’이라는 절박감뿐이었다. 폭탄에 가까운 광고 세례를 퍼붓는 동시에, 직원이나 사장 모두 너나없이 전국 슈퍼와 주류 도매상을 누비며 하이트 홍보에 나섰다. 그 결과 3년 만인 1996년 7월, 마침내 OB맥주의 40년 아성을 무너뜨리고 시장점유율 1위에 올라섰다.

그러나 승리의 기쁨도 잠시, 외환위기가 닥치면서 조선맥주는 새로운 고비를 맞았다. 금리가 30%까지 치솟는 외환 위기가 닥칠 것을 예견하지 못하고, 4천억원을 투자해 홍천 공장을 지은 것이 화근이었다. 외환위기가 터지면서 하이트는 연간 갚아야 할 이자만 8백억원으로 불어났다. 돈을 빌려주며 공장을 지으라고 부추겼던 은행권마저 워크아웃이나 구조 조정을 택하라고 권했다.

유일하게 살 길은 구조 조정과 외자 유치였다. 박대표는 회사와 함께 생사고락을 같이한 영등포 공장을 팔고, 사명을 바꾸는 식으로 구조 조정을 단행했다. 하이트맥주 홍보실 유경종 차장은 “공장을 판 뒤 조선맥주 식구들은 지은 지 27년이 넘은, 회장 비서실까지도 비가 새는 창고나 다름없는 건물에서 3년 넘게 고생해야 했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버는 족족 빚을 갚았다. 그같은 노력이 발판이 되어 외자 유치에도 성공했다. 미국 캐피탈그룹에서 3천만 달러, 칼스버그그룹으로부터 1억 달러를 유치해 빚 4천억원을 갚아버린 것이다. 1998년 361%에 달했던 부채비율도 이듬해에 216%로 낮아졌고, 2004년 말에는 102%까지 떨어졌다. 
 
같은 시기 진로 장진호 회장도 회사를 구하기 위해 외자 유치에 팔을 걷어붙였다. 부도를 내기는 했지만 대기업으로는 처음으로 화의를 인가받아 회생을 모색할 수 있었다. 이자만 갚고 원금은 2003년부터 5년간 갚는 조건으로 화의를 인가받았다. 장회장은 외자 유치를 위한 자문을 하기 위해 해외 유수의 컨설팅업체를 찾아나섰고, 그 과정에서 골드만삭스를 만났다. 하지만 그것은 악연의 시작이었다(딸린 기사 참조). 장회장은 외자 유치에는 성공하지 못했고, 골드만삭스는 자산관리공사로부터 진로 채권을 사들여 오히려 진로의 채권자가 되었다.
채권자가 된 골드만삭스는 진로가 원금을 갚기로 한 2003년 약속을 이행하지 못하자 재빠르게 법정관리 신청을 냈다. 다른 채권자들의 반대와 진로의 반발 속에서도 한국 법정은 골드만삭스의 손을 들어주었고, 2004년 진로는 법정관리에 들어갔다. 진로가 법정관리에 들어감으로써 장회장의 지분은 휴지 조각이 되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장회장은 공금 횡령 등의 혐의로 실형까지 선고받았다( 지난해 집행유예로 풀려남).

그 와중에도 진로는 전직원이 힘을 합해 신제품을 내고 ‘헝그리 정신’으로 몸으로 때우는 마케팅 실력을 발휘하며 해마다 천억원이 넘는 이익을 냈다. 2004년 진로의 매출액은 6천9백억원, 영업이익은 1천9백30억원 이었다. 1998년 7백90억원이었던 영업이익은 6년 만에 2.5배 이상 늘어났다(지난해 하이트맥주는 총매출액 1조9천2백33억원, 순이익 1천1백2억원의 실적을 올렸다). 그렇지만 진로는 하이트를 새 주인으로 맞아들여야 할 운명을 피하지 못할 처지이다.

한편 ‘한우물 전략’과 ‘짠돌이 경영’으로 OB맥주라는 경쟁자와 외환위기의 파고를 넘은 하이트맥주는 주류 천하 통일을 꿈꾸며 진로 인수를 차곡차곡 준비해왔다. 시장에서는 두산이나 롯데, CJ가 진로를 인수할 것이라고 전망했지만, 하이트맥주는 아무도 모르게 물밑에서 인수 전략을 짰다. 박문덕 회장을 중심으로 한 핵심 경영진은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한국교직원공제회와 군인공제회 등 ‘토종 자본’을 우호 세력으로 끌어들였다. 그리고 모든 과정을 사내에서까지 비밀에 부쳤다. 우선협상대상자가 발표될 때까지 하이트맥주 임원들조차 ‘두산이 가장 많은 금액을 써넣었다’고 알고 있을 정도였다.

지나치게 비싼 금액을 써냈다는 비판을 받고 있지만, 하이트가 진로를 인수하게 되면 그 이상의 이익을 거둘 것으로 보인다. 동양증권 이경주 연구원은 “사려는 사람이 많아 진로 가격이 올라간 것이지, 진로를 인수하려했던 경쟁 업체 중 하이트만큼 큰 이익을 얻을 회사는 드물다”라고 말했다. 당장 비용 절감 효과를 꼽을 수 있다. 두 회사는 아이템은 다르지만 업종이 같아서 중복되는 인력과 마케팅 부문을 효율적으로 재조정할 경우 영업이익을 20% 이상 늘릴 수 있다고 업계 전문가들은 예측한다.  

무엇보다 매력적인 것은 7조2천억원에 이르는 국내 주류 시장을 손안에 넣고 휘두를 수 있다는 점이다. 하이트가 진로를 인수할 경우 국내 주류 시장의 40% 이상은 하이트맥주 손아귀에 들어간다. 한 주류 도매상은 “지금까지 주류 시장은 제조사보다 유통업에 의해 좌우되었지만, 앞으로는 하이트맥주가 주도할 것이다”라고 내다보았다. 소주와 맥주가 대부분인 국내 주류 시장에서 하이트맥주는 맥주 시장 점유율 58%, 진로는 소주 시장 점유율 55.4%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상승 효과도 적지 않다. 우선 OB맥주에 뒤져 있는 수도권 시장에서 상당히 유리한 고지를 마련할 수 있다. 하이트맥주는 수도권에서 시장점유율 40%로, 60%인 OB에 뒤져있지만, 수도권을 장악하고 있는 진로의 유통망을 발판 삼아 1위 탈환을 시도할 수 있다. 한 주류업계 관계자는 “하이트맥주가 90% 가까운 시장점유율을 보이는 영남권 시장에서는 20%밖에 차지하지 못하고 있는 진로가 하이트맥주에 기대어 약진할 가능성도 높다”라고 전망했다.
하이트맥주는 진로를 발판 삼아 위스키 사업과 해외 사업 약진에도 박차를 가할 수 있다. 하이트맥주는 ‘랜슬럿’이라는 브랜드로 위스키 사업에  뛰어들었지만, 시장에서 밀리는 형편이다. 2004년 말 기준 시장점유율은 3.9%. 하지만 국내 위스키 시장의 쌍두마차인 진로발렌타인스 지분을 30% 보유한 진로를 손에 넣을 경우 상황은 달라진다. 세계 60개 나라에 진출해 있는 ‘진로재팬’을 기반으로 일본·중국 시장에 진출할 기회를 잡을 수도 있다. 내수 기업에서 수출 기업으로 탈바꿈할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하이트맥주가 진로를 가져오려면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남아 있다. 우선 협상 과정이 남아 있고, 공정거래위원회로부터 독과점이 아니라는 판단을 받아야 한다. 인수 자금을 마련하는 것도 당면 과제다.

아직 진행 중이지만 한때 ‘비교도 안될 만큼’ 격차가 벌어졌던 두 기업의 운명은 서로 정반대 곡선을 그린 끝에 한가족으로 만날 상황에 놓였다. 그 곡선의 교차점을 만든 주인공은 대주주이자 오너였던 최고경영자들이다. 진로와 하이트맥주의 엇갈린 운명 이야기는, 기업의 운명이 최고경영자의 손에 달렸음을 새삼 일깨운다.

 
하이트맥주가 진로를 인수할 경우 최대 수혜자는 진로 채권을 가장 많이 쟁여 놓고 있는 골드만삭스이다. 골드만삭스는 1997년 자산관리공사로부터 진로 채권을 액면가의 10~20% 수준에 사들였다.  진로가 하이트맥주가 제시한 3조1천6백억원에 팔릴 경우 골드만삭스는 500%에 육박하는 수익을 내며, 1조원 정도를 벌 것으로 알려졌다.

진로가 남의 집에 팔려가는 신세가 된 이유 가운데 하나는 골드만삭스와의 악연 때문이다. 진로의 한 관계자는 “골드만삭스 때문에 외자 유치와 구조 조정 작업이 원활하게 이뤄지지 못했고, 화의 상태에서 법정관리 상태로 전락했다”라고 말했다.

골드만삭스는 진로 채권을 사기 전에 장진호 진로 전 회장의 요청으로 진로 측 사람들과 만났다. 진로와 골드만삭스의 1라운드 싸움은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진로측은 이 과정에서 진로의 경영 정보가 넘어갔다고 주장했다. 진로그룹 부도 이후 진로 전 경영진은 ‘골드만삭스가 내부 정보를 이용해 진로 채권을 사들였다’며 골드만삭스를 고발해 법정싸움을 벌였다. 하지만 이 싸움은 ‘투자 부서와 컨설팅 부서는 서로 분리되어 있어 정보를 공유하지 않는다’고 주장한 골드만삭스의 승리로 끝났다. 법정은 진로가 골드만삭스를 만났을 때 회사의 기밀을 넘겨주었다는 증거가 없다며 골드만삭스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제2 라운드는 2003년 골드만삭스가 원금을 갚지 못하는 진로를 법정관리로 밀어넣으면서 다시 불거졌다. 당시 진로는 주채권자인 골드만삭스가 회사를 살리기 위한 노력보다 매각을 통한 이익 추구를 위해 진로를 법정관리로 떠밀었다며 반발했다. 진로와 다른 채권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진로는 골드만삭스의 희망대로 법정관리에 들어갔다.

매각 직전까지 골드만삭스의 진로 몸값 부풀리기는 계속되었다. 지난해 4월까지만 해도 진로의 가치는 1조8천억원대로 평가되었고, 증권가에서도 최대 2조5천억원으로 추정했지만, 골드만삭스는 외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진로 가치가 3조6천억원에 이른다고 주장했다. 가뜩이나 입찰 참여자가 많아 가격이 오를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주채권자 골드만삭스가 제시한 이 금액은 진로 입찰가의 가이드라인 역할을 하고 말았다.

하지만 막상 하이트맥주가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되자 골드만삭스 리서치팀은 하이트맥주의 인수 가격은 너무 높다는 정반대 의견을 내놓았다. 투자부와 리서치부가 분리되어  빚어진 혼선이라고 치부하고 넘어가기에는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는 여론이다. 동일한 ‘물건’에 대한 한 회사의 평가가 주인이 정해지는 시점을 전후해 상반되게 나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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