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심’ 잡은 그녀들의 ‘입심’
  • 이숙이 기자 (sookyiya@sisapress.com)
  • 승인 2005.04.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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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우리당 김현미 대변인·서영교 부대변인, 시·도당 선거에서 ‘깜짝 돌풍’

 
"앞으로 대변인단은 당내 선거에 안 나간다는 조건을 달고 임명할까 생각 중이다.”

지난 3월28일 열린우리당 집행위원회의를 주재하던 임채정 의장이 얼굴 한가득 웃음을 띠며 농담을 던졌다. 그 전 주말 치러진 경기도당과 서울시당 중앙위원 선거에서 김현미 대변인과 서영교 부대변인이 깜짝 돌풍을 일으킨 것을 두고 한 얘기다. 김현미 대변인은 21명 중에 전체 1등을, 서영교 부대변인은 23명 중에 전체 3등, 여성 1등을 차지했다.

각각 비례대표와 원외 출신인, 그래서 상대적으로 조직에서 취약할 것으로 여겨지던 두 여성이 약진한 것을 두고 여권에서는 ‘대변인실의 파워’라는 해석이 나온다. 두 사람 고유의 강점도 있지만, 평소 언론과 부대끼고 야당과 고공전을 벌이며 갈고 닦은 전투력이 실전에서 위력을 발휘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두 사람은 대변인실 경력이 선거에 도움이 되었음을 부인하지 않는다. 당 안팎에 이름과 얼굴을 알릴 기회가 많아 인지도가 웬만한 중진 의원 못지 않고, 당과 언론 사이에서 연결 고리 역할을 하는 업무 특성상 부지불식간에 ‘숨은 인연’이 많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7백7표를 얻은 서영교 부대변인은 “처음엔 ‘3백표 정도 얻으면 당선권에는 들겠지’하는 두려움을 안고 시작했다.

선배 박선숙 '우먼 파워' 이어

그런데 막상 선거운동에 들어가자 예상치 않았던 지지자들이 곳곳에서 나타났다”라고 말했다. 한 현역 의원은 “왜곡된 언론 보도로 곤경에 처했을 때 서부대변인이 발 벗고 해명해준 적이 있다”라며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한 개혁당 출신 당원은 “기간당원제 쟁취를 외치며 중앙당사에서 농성할 때 서부대변인이 신기남 의장을 만나게 해주는 등 도움을 많이 주었다”라며 반가움을 표시하더라는 것이다. 

 
당에 대한 공헌도를 쉽게 인정받을 수 있다는 점도 장점이다. 투표 당일 현장 연설에서 김현미 대변인은 그동안 한나라당과 대립각을 세웠던 전력을 조목조목 나열했다. 원정 출산, 빌라게이트, 유신공주, 재향군인회 공격 등 상대 당을 공격했던 이력이 나오자 대의원들 사이에서 “맞아 맞아” 하는 반응이 절로 나왔다. “나를 당선시켜 주면 다음 총선에서 반드시 한나라당 김영선 의원(경기 고양 일산 을)을 이기겠다”라는 대목에서는 친유시민 당원들도 박수를 쳤다. 이번 전당대회 과정에서 김대변인은 “유시민 의원 지지하는 국회의원은 5명도 안된다”라고 일갈했다가 이른바 ‘유빠’들로부터 총공세를 당해온 터였다.

김현미 대변인에 이어 서영교 부대변인까지 선전하면서, 여성 부대변인들의 ‘릴레이 활약’이 새삼 눈길을 끈다. 여성 부대변인은 10년 전 박선숙 현 환경부 차관이 새정치국민회의 부대변인으로 임명된 것이 첫출발이었다. 세종대 졸업 후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에서부터 김근태 보건복지부장관과 재야 활동을 해온 박차관은 1995년 지방 선거를 앞두고 김장관과 함께  (꼬마) 민주당에 입당했다. 이듬해 두 사람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창당한 새정치국민회의를 통해 15대 총선에 도전했는데, 김장관은 지역구에서 당선하고, 박차관은 비례대표에서 낙선했다.

김 전대통령이 당선하기까지 박차관은 3년 가까이 조용하지만 야무진 부대변인 역할을 했다. 청와대에 들어가서는 최초의 여성 대변인, 최초의 여성 공보수석이라는 기록을 세우더니, 참여정부에 들어서는 최초의 여성 차관이라는 타이틀까지 거머쥐었다. 경기도 포천 출신인 박차관은 요즘 4·30 재·보궐 선거 영입 후보로 유력하게 거론되기도 한다.  ‘DJ +노무현’의 상징성에 여성이라는 점까지 감안하면 포천·연천 지역 열린우리당 후보로 최적이라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박차관 본인은 1%의 가능성도 없다며 딱 잘라 부인한다.

 
김현미 의원은 1998년 박차관이 청와대로 차출되면서 부대변인 자리를 물려받았다. 연세대 졸업 후 부평의 한 형광등 공장에서 노동운동을 하다가 1987년 평민당에 들어간 지 11년 만의 일이다. DJ 비서실에서 당보를 만들며 정당 생활을 시작한 김의원은 그 사이 국회의원(이우정 의원) 비서 경험도 쌓았고, 1995년에는 정당 사상 처음으로 ‘TV 모니터팀’을 만들어 야당에 유독 비우호적인 방송 뉴스를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감각을 키워왔던 터였다. 박차관은 당시 김부대변인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첫 여성 부대변인이라는 프리미엄을 누렸다. 두 번째인 김현미씨가 어떻게 하느냐에 여성 부대변인의 명맥이 이어지느냐 마느냐가 달려 있다.”

그 말이 주는 무게감 때문이었을까. 김의원은 정동영 김영환 김민석 김한길 전용학 이낙연 문석호 등 대변인 10여 명을 모시는 5년 1개월 동안 말 그대로 ‘악바리 부대변인’ 노릇을 했다. 2002년 노무현 대통령 당선과 함께 당선자 부대변인까지 했던 김의원은 청와대 국내언론비서관과 정무비서관을 거쳐 17대 국회에 당당하게 입성함으로써 마침내 ‘부’자를 벗어던지고 대변인 자리에 올랐다.

계파 치우치지 않는 여성 특유 품성 '강점'

김현미 의원이 청와대로 입성하면서 바통을 이어받은 주자가 서영교 부대변인이다. 이화여대 총학생회장 출신인 서부대변인은 2000년 새천년민주당 창당준비위원으로 정당 생활을 시작했다. 그 사이 민주쟁취국민운동본부 간사를 거쳐 8년 넘게 중랑구에서 무료 도서대여점을 운영했고, 1999년에는 여성정치세력민주연대 운영위원도 역임했다. 중랑구 출신인 이상수 전 의원과는 민주쟁취국민운동본부 시절부터 알고 지냈고, 남편인 장유식 변호사(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도 이 전의원과 가까워 당 안에서는 ‘이상수 계보’라는 소리도 듣는다. 두 선배와 달리 서부대변인은 당내 선거에서부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열린우리당 창당 직후 치러진 2004년 2월 중앙위원 선거에 출마해 ‘여성 중앙위원 15명’ 명단에 당당하게 이름을 올리더니, 17대 총선 비례대표 공천에서 아슬아슬하게 탈락한 지 1년 만에 또다시 일을 낸 것이다.

 
박선숙→김현미→서영교로 이어지는 여성 부대변인의 약진을 지켜본 정가의 관심은 자연스레 유은혜 부대변인 쪽으로 돌아간다. 열린우리당 창당과 함께 입당한 유부대변인이 2004년 총선 때부터 대변인실에 합류해 후발 주자로 뛰고 있기 때문이다. 성균관대를 나온 유부대변인은 박선숙 차관과 통일시대국민회에서부터 함께 활동해 인연이 깊다. ‘김근태 후원회’ 사무국장, 한반도재단 사무국장, 김근태 의원 보좌관 등을 거친 정통 GT계로, 남편 역시 한반도재단에 몸 담고 있다.

‘권’ 출신에, 운동권에서 배우자를 만났고, 민주화운동에 투신하다가 정치권에 몸담았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 여성 부대변인들의 잇단 활약에 남자 부대변인들은 상대적으로  위축되는 기색이다. 이를 두고 정가에서는, 야무진 일솜씨도 일품이지만 어느 한 계파에 매몰되지 않고 두루두루 잘 지내려는 여성 특유의 품성이 강점으로 작용하는 것 같다고 입을 모은다. 김근태계로 입문했지만, 김대중·노무현 정권에 연이어 기용되고 정동영 장관과도 가깝게 지내는 박선숙 차관의 경우가 그 전범으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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