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아이의 위대한 슬픔
  • 김봉석 (영화평론가) ()
  • 승인 2005.03.25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영화평] 아무도 모른다

연출 :  고레에다 히로카즈
출연 : 기무라 히에이·유야 야기라

 
이 세상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아무도 모른다. 알고 있는 것은 텔레비전과 신문을 통한 뉴스, 눈으로 직접 본 주변의 일들과 소문뿐. 뉴스 속의 그들이 정말 어떤 사람인지, 누구인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우리는 단지 우리가 알고 싶은 것만을 받아들인다. 고통스러운 것, 쉽게 판단할 수 없는 것을 우리는 외면한다. 개인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시스템이 그렇다. 그러나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딘가에서, 우리의 시선이 멈추는 바깥에서 누군가가 살고 있다.

네 아이들이 살아간다. 서로 아버지가 다른 4명 아이. 젊은 엄마 혼자 그 아이들을 키운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집을 구하고 돈을 벌어온다. 나머지는 아직 초등학교 6학년 나이인 아키라가 한다. 동생들을 돌보고, 장을 봐서 음식을 만들고, 가끔은 공부도 한다. 집 주인들은 아이가 많은 가정을 꺼리기에 동생들의 존재는 숨긴다. 일단 이사를 한 후 동생들은 큰 가방 속에서 나오거나 슬쩍 숨어 들어온다. 학교도 가지 않고, 집안에서 아이들끼리만 생활한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는 다른 남자에게 가버린다. 아키라와 동생들은 그들만의 생존을 시작한다.

<환상의 빛> <원더풀 라이프>를 만들었던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다큐멘터리 출신 감독이다. 후샤오시엔에게 영향을 받아 극영화를 만들기 시작한 고레에다는, 그들의 마음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그들의 주변을 공들여 찍는다. 엄마의 매니큐어를 바른 교코의 손을 보여주고, 아키라가 물건을 사는 편의점의 카운터 너머에 있는 다정한 여인을 비추어 준다. 뭔가 커다란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작고 사소한 모든 것들이 어떻게든 관계를 맺어가며 그들이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어 간다는 것을 비추어 준다.

엄마가 사라졌지만, 그래서 과거의 질서가 사라졌지만, 궁극적으로 그들의 세상은 변하지 않았다. 그들은 대도시 안에 존재하지만, 그들 자신만의 무인도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들만의 세상에서, 우리들의 도움 없이도 그들은 그렇게 살아간다. 그 마음의 거리가 <아무도 모른다>를 위대한 슬픔으로 만들어낸다.

그러나 어른들은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다. 아니 그것이 그들이 책임지는 방식인지도 모른다. 그들의 아버지는 어디론가 사라져버렸고, 존재하는 아버지들은 가끔 용돈을 주는 것뿐이다. 엄마는 그들과 함께 살다가 ‘나는 행복해지면 안되니’란 말을 남기고 슬쩍 사라져버린다. 그들을 무작정 미워할 수는 없다. 그러나 자신의 행복을 위해 타인에게 고통을 주는 것까지 용납할 수는 없다. 그 부모들은 이 무책임하고 잔혹한 사회의 지배자들이다. 시스템에 기생하며 자신의 행복을, 즐거움을 찾아가는 지배자들이다.

우리가 그 아이들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을까. 제목 그대로 아무도 모른다, 아무 것도 모른다. 이제 시게루는 베란다에 나가고, 유키는 엄마를 마중하러 역에 나가겠다고 떼를 쓴다. 쿄코는 벽장에서 나오지 않고, 아키라도 지쳐간다. 친구들을 집에 데려오고 고함을 지르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에게 당면한 것은 생존이다. 숨이 막힐 듯이 그들은 살아가는 것 자체에 집중한다. 아이들에게 존재하는 당연한 욕망을 억누르고 오로지 생존만을 생각한다.

<아무도 모른다>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들을 처절하게 보여주기만 한다. 그러나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에게는 명확한 자신만의 시선이 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시선은 다정하다. 동정이나 연민이 아니다. 자연을 바라보는 그윽한 마음처럼 고레에다는 그 아이들의 세계를 보아준다. 보는 것, 그것만으로도 누군가에게는 힘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