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회의 진수를 보여주다
  • 류재화 통신원 (스트라스부르) ()
  • 승인 2005.03.24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가해자 독일, 피해자 프랑스와 ‘공동 역사 교과서’ 편찬 합의

 
 ‘두 개의 기억, 하나의 역사’. 2006년 새 학기부터 프랑스와 독일의 고등학생들은 똑같은 역사 교과서를 가지고 공부하게 된다. 독도와 역사 왜곡 문제를 놓고 다시 악화일로인 한·일 관계와 견주어보면, 상당히 대조적이다.

프랑스와 독일이 역사 교과서를 ‘공유’하기로 최종 합의한 것은 지난 3월10일. 이 날 두 나라 정부가 ‘공동 역사 교과서’ 편찬안을 공식으로 내놓은 것이다. 프랑스와 독일은 교과서 공유를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결과로 받아들인다. 독일은 이미 몇년 전부터 자국의 역사,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의 역사에 대해서는 프랑스·폴란드 등 이웃 나라의 의견을 들어 서술해 왔다. 이웃 나라 역사학자와 해당 과목 교사들이 일종의 ‘권고안’을 보내, 왜곡 가능성을 줄인 것이다. 하지만 이번 공동 교과서 집필안은 이보다 한 발짝 더 나아간 것이다.

 집필위원회는 ‘하나의 역사’가 아닌 ‘두 기억’을 강조하겠다고 분명히 밝혔다. 하나의 역사를 두 나라가 서로 다르게 기억하고 해석하는 방식과 그 이유를 설명하는 역사책을 만든다는 것이다. 특히 독일 제국의 점령 당시 알자스로렌의 영토 분쟁, 양국민에게 고통스런 과거로 각인된 양차 대전 부분에 대한 서술에 관심이 모아진다.

 공동 역사 교과서 프로젝트의 주요 기획자인 프랑스 교육부 장 루이 냉브리니는 “공동 교과서를 내는 것은 양국간 역사 합의를 도출하자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공통 분모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기억·다른 시선을 강조하게 될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각국의 시각에 따라 생략되거나 누락된 내용과 자료들이 이번 기회에 상당히 보충된다. 예컨대 프랑스 역사 교과서는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와 함께 동독에 대한 기술을 생략했지만, 독일은 사정이 다르다. 독일인들에게 통일은 과거완료형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이다. 

역사 교육은 자국 중심일 수밖에 없다. 역사 교육은 애국심을 고취하게 마련이고, 정부 입김 또한 작용한다. 프랑스 언론들은 이번 공동 교과서 집필안이 이를 극복하려는 시도라는 점에서 상징적 의미가 크다고 논평하고 있다.

 
새 역사 교과서는 내년 봄 ‘2차 세계대전 이후~현재’를 다루는 제1권이 가장 먼저 출간되는데 이 새 교과서는 바칼로레아를 준비하는 프랑스 고등학교 3학년생이 배운다. 이어 ‘19세기~양차 대전’까지를 집중 조명하는 제2권, ‘고대~독일 낭만주의 시대’를 다루는 제3권이 출간된다. 저술은 양국의 저명한 역사학자 8명이 공동으로 맡게 되며, 각기 자기 나라 언어로 동시 출판하는데, 출판사는 나당(프랑스)과 에른스트 클레트(독일)가 선정되었다.

민족주의와 국수주의의 망령에서 벗어나 비판적인 민주 시민을 키워야 한다는 교육의 본령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이같은 혁신적인 역사 교육 기획안의 배경에는 또 다른 맥락이 있다. 미국 주도로 재편되는 세계 질서에 대한 유럽인들의 조바심이 반영되어 있다. 유럽이 내세우는 기치는 ‘유럽의 깃발 아래서, 각 공화국의 품에서, 잘 자라나는 훌륭한 민주 시민이 되자’는 것이다. 지난 3월10일 독일 베를린 기자 회견에서 프랑수아 피용 프랑스 교육부장관은 ’유럽 공동의 비전‘을 강조했다.

공동 교과서 기획안이 처음 나온 것도 2003년 1월23일 베를린에서 열린 엘리제 조약 40주년 기념 행사장에서였다. 엘리제 조약은 1963년 1월 프랑스·독일이 맺은 우호 조약으로 이후 양국간 경제·문화 교류가 크게 확대되었다. 현재 양국의 교환 학생 수만 20만 명에 이르며, 7만명 이상이 상대 나라에 유학 중이다. 또 두 나라는 1994년부터 프랑스 바칼로레아와 독일 아비투를 결합한 ‘아비박’ 학위 제도를 실시해 왔다.

유럽을 진동시키는 영어의 위세는 두 나라간 교과서 공동 작업을 더 촉진하는 결과를 낳았다. 프랑스·독일 모두 상대 나라 언어를 배우려는 학생 수가 크게 감소하고 영어를 배우려는 학생 수가 급증하면서 양국 교육 당국이 더욱 더 위기감을 느낀 것이다.

프랑스와 독일, 특히 독일의 ‘교과서 공조’에 깔린 기본 발상은, 동아시아 특히 일본에 교훈적이다. 독일은 가해에 대한 참회를 통해 지역의 일원이 되고자 하는 반면, 일본은 가해 사실을 부정하거나 왜곡하면서 지역에 군림하려는 쪽으로 방향을 잡고 있는 것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