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로지 나를 위해 땀 흘린다”
  • 이문재 편집위원 (moon@sisapress.com)
  • 승인 2002.09.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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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끈했다. 문을 열자 마치 사우나에 들어서는 것 같았다. 숨이 턱 막히는 열기만이 아니었다. 소리도 엄청났다. 호각소리, 고함소리, 선수들의 숨소리, 기합 소리, 매트에 몸이 넘어지는 소리…. 코치와 선수 들이 내는 높고, 짧고, 거칠고, 둔중한 소리들에 익숙해지고 나서야 실내가 하나하나 눈에 들어왔다. 성난 듯 잔뜩 부풀어 있는 상체 근육이며, 한밤중이라면 푸른 안광을 내쏠 것 같은 눈빛, 4개의 매트, 수시로 출렁거리는 생수통, 그리고 훈련 일정이 빼곡한 메모판.


지난 9월10일, 아니 부산아시안게임 D-19일 오후, 서울 공릉동 태릉선수촌 필승관에서는 레슬링 국가대표 선수들이 막바지 피치를 올리고 있었다. 선수들의 체력은 임계점을 넘어서 있었다. 그레꼬로망형 유영태 감독은 힘들 때 하나 더 시키는 것이 지도자라고 말했다. 레슬링은 쇼트트랙과 함께 태릉선수촌에서 훈련 강도가 가장 세기로 유명한 종목. 한 여자 레슬링 선수는 훈련이 너무 고되어 아침 먹고 자고, 점심 먹고 또 잔다고 말했다.


태릉선수촌은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체력과 기술력을 정상까지 끌어올려 놓은 다음, 경기 2주 전인 9월17일께부터는 컨디션 조절에 들어가야 한다. 태릉선수촌 장창선 촌장은 부상을 방지하고, 정신적으로 안정감을 가져야 하는 시기라고 말했다(78~79쪽 상자 기사 참조). 체력과 기술력이 최상의 상태라고 해도, 자칫 부상하거나 심리적으로 흔들리면 메달은 남의 목에 걸리고 만다. 이맘때면 선수와 지도자 들은 스포츠심리학에 도움을 요청한다(81쪽 관련 기사 참조).


한국 선수단 7백70명 중 3백14명 입촌


아시안게임에 참가하는 선수들이 모두 태릉에 입촌해 있는 것은 아니다. 숙소가 턱없이 모자라기 때문이다. 9월11일 현재 선수촌에 들어와 있는 선수들은 육상 하키 탁구 남자배구 수영 레슬링 남자체조 역도 유도 우슈 핸드볼 배드민턴 등 14개 종목, 3백14명. 이번 대회에 출전하는 한국 선수 7백70명 가운데 절반 이상이 선수촌 밖에서 훈련하고 있다.





9월11일 아침 6시10분, 선수촌 스피커에서 행진곡이 울려 퍼졌다. 진돗개 ‘태백이’와 함께 장창선 선수촌장이 운동장 입구에서 선수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선수들은 하나같이 무표정했고, 걸음걸이도 느렸다. 6시30분, 유연체조가 끝나자 선수들의 움직임이 달라졌다. 레슬링 팀은 400m 트랙을 전력 질주했고, 여자 하키 선수들은 2열 종대로 달렸다. 여자 유도팀은 ‘아악’ 소리를 내며 계단을 오르내렸고, 우슈팀은 왕복달리기를 했다. 7시30분쯤 아침 운동이 끝나면 식사를 한 뒤 잠시 쉬었다가 10시부터 12시까지 오전 훈련에 들어간다. 점심을 먹고 나서 오후 3시부터(일부 팀은 2시부터) 6시까지 다시 훈련. 훈련 강도가 센 날에는 체중이 2~3kg 빠지기 때문에 현기증이 날 정도라고 한다.


이 날 오전, 여자 하키 팀은 월계관에서 웨이트 트레이닝에 들어갔다. 레슬링·태권도·양궁·체조(남) 등과 함께 금메달 유망 종목으로 손꼽히는 여자 하키 선수들은 평균 연령이 많이 낮아졌다. 23∼24세. 여자 하키 김상열 감독은 지난해까지 14년 동안 남자 하키팀을 지도했었다. 시드니올림픽이 끝났을 때 협회에 사의를 표명했다가 여자 팀을 맡아달라는 제의를 받았다. 여자 하키는 시드니올림픽에서 9위를 차지해 위기를 맞고 있었다. 김감독은 선수 장악 능력을 강조해 왔다. 해당 종목에 대한 지식을 그때그때 섭렵해야 하는 동시에, 문제 해결 능력이 있어야 선수와 지도자 사이에 신뢰가 생긴다는 것이다.


여자 하키는 레슬링·양궁·쇼트트랙 등과 더불어 효자 종목이자 비인기 종목이다. 김감독은 “토양이 너무 부족하다. 1백20명 중에서 대표선수 10여 명을 선발해야 하는 형편이다. 소년체전을 활성화해 비인기 종목 꿈나무들을 키워야 한다”라고 말했다. 김감독은 매년 초, 프로 선수들의 계약금이나 연봉이 매스컴을 통해 알려질 때마다 후배 선수들을 바로 보지 못한다. ‘내가 왜 이 종목을 택했나’하는 자괴감까지 든다.


12시, 점심 시간. 식당에 들어서면 피부나 체형만 보아도 어떤 종목인지 대충 알 수 있다. 하키 팀은 얼굴이 까맣다. 어깨에 얼음주머니를 대고 있는 키 큰 선수들은 영락없이 배구 선수들이고, 레슬링 선수들은 귀를 보면 된다. 앳된 선수들은 체조나 수영이다.


종목에 따라 열량 섭취량에 차이가 있는 것은 물론이다. 15년째 선수촌에서 식단을 짜고 있는 영양사 조성숙씨에 따르면, 체조 선수들이 하루 2500kcal로 가장 적고, 레슬링 무제한급 선수가 하루 6000kcal로 가장 많다. 구기 종목은 4500kcal 수준. 3백 명이 넘는 선수가 하루에 소비하는 쌀은 100kg, 고기류는 1백20kg에 달한다. 조성숙씨는 “에너지 소모가 극심하기 때문에 식욕을 잃기 쉽다. 그래서 맵고 짠 음식을 식단에 포함한다”라고 말했다.





“레슬링 선수들은 매우 온순”


점심 시간 직후, 선수촌은 조용하다. 오전 훈련이 고되어 낮잠 자는 선수들이 많기 때문이다. 낮잠을 잔다고 해서 마음이 편한 것은 아니다. 대부분 크고 작은 부상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에 틈이 날 때마다 물리 치료를 받는다. 선수 식당 2층 물리치료실은 하루 1백50명 정도가 이용한다. 물리치료사 6명과 간호사 2명 그리고 의사 1명이 아침 9시부터 밤 9시까지 선수들을 돌본다.


물리치료사 이재훈씨는 10년째 대표선수들의 관절과 근육을 어루만지고 있다. 이씨에 따르면, 투기 종목은 발목 무릎 허리 어깨 등 큰 관절 순으로 많이 다치고, 사격이나 양궁 선수들은 근육통을 호소한다. 코치나 감독 못지 않게 선수들과 가까이 지내는 이씨는 종목 별로 기질이 다 다르다고 말한다.

예컨대 체격이 비슷해도 배구 선수들은 깔끔하고, 농구 선수들은 몸싸움이 심해서 그런지 인간적인 친밀감이 드러난다. 개인 종목인 사격이나 양궁 선수들은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하다. 배드민턴 선수들은 대체로 차분한 편이다. 레슬링 선수들이 가장 의외다. 유영태 감독은 “겉보기에는 우락부락하지만, 레슬링 선수들은 평소 아주 온순하다”라고 말했다. 여자 레슬링 63kg급에 출전하는 황진영 선수는 “운동 선수들은 모두 일반 사람들보다 착하다”라고 말했다.


무서운 지도자=무능한 지도자


선수들이 일반인과 크게 다른 것 같지만, 경쟁 논리에 편입되어 있다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다. 고등학생들이 입시 학원에서 일류 대학을 꿈꾸며 밤잠을 아끼듯이, 대표 선수들은 선수촌에서 금메달을 따기 위해 몸과 마음을 관리한다. 바깥 사회가 급격하게 변화했듯이 선수촌도 급변하고 있다. 선수촌을 움직이는 엔진 역시 승리 제일주의다. 그리고 승리 제일주의는 ‘돈’과 직결되어 있다.


대부분 국가 대표 선수 출신인 코치·감독 들에 따르면, 선수촌 분위기는 과거에 비해 많이 부드러워졌다. 20년 전까지만 해도 구타가 잦았다. 요즘에는 ‘무서운 지도자’라는 말이 곧 ‘무능한 지도자’라는 뜻으로 통한다. 선수들이 땀을 흘리는 이유도 예전 같지 않다. 헝그리 정신으로 무장한 선배들이 ‘국가와 민족을 위해’ 금메달을 땄다면, 핸드폰을 들고 다니는 신세대 선수들은 ‘오직 나’를 위해 메달을 노린다. 배드민턴 김문수 코치는 “선수들이 국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기보다 저마다 개인적인 목표를 갖고 있다”라고 말했다.




선수들이 땀을 흘리는 이유가 달라진 것은 프로 스포츠의 열기와 그에 따른 비인기 종목 쇠퇴와 무관하지 않다. 지난 8월 초, 국가 대표 선수와 지도자 들이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훈련을 거부하겠다고 나섰던 것도 그 때문이다. 국가대표 코치협의회 회장을 맡고 있는 김상열 여자 하키 감독은 “월드컵 축구팀이 이룬 성과의 의미를 부정하자는 것이 아니었다. 형평성의 문제였다”라고 말했다. 축구 선수들이 일당 15만원에 포상금을 몇 억원씩 받을 때, 비인기 종목 대표 선수들은 하루에 수당 5천원을 받고 있었다. 팀에 소속되어 있지 않은 국가 대표 코치의 월수입은 1백80만원이었다.


“비인기 종목 몰락해 올림픽 후진국 될 것”


그간 대한체육회나 선수촌의 행정에 대한 지도자들의 불신은 제법 깊어 보였다. 한 감독은 “선수촌이 협회가 뽑아 보낸 대표 선수를 위탁 교육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없는 예산으로 도와준다는 사고방식에서 어떻게 적극적인 지원이 가능하겠는가”라고 말했다. 비인기 종목 지도자들은 2~3년 안에 엘리트 스포츠가 몰락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감추지 않는다. 프로 스포츠에는 선수들이 넘치는 반면, 비인기 종목은 아예 저변이 무너지고 있기 때문이다.


김상열 감독은 생활(평생) 체육에 대한 배려도 중요하지만 생활 체육 때문에 엘리트 체육이 붕괴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김감독은 “올림픽은 국가간 경쟁이다. 이대로 가다간 다음 올림픽에서 태권도·양궁 이외에는 금메달을 기대하기 어렵다”라고 단언했다.


비인기 종목 선수들에게 아시안게임, 혹은 올림픽은 평생 한두 번 올까말까한 천금 같은 기회이다. 메달 색깔과 개수가 개인의 명예는 물론 미래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남자 선수들은 연금에다 병역 문제가 걸려 있다. 우슈처럼 대학에 종목이 없고 실업팀조차 없는 비인기 종목의 여자 선수는 더 절박하다. 우슈 투로에 출전하는 차은미 선수는 “여자 우슈 선수는 선수촌에서 받는 일당이 수입의 전부다. 우리 같은 종목은 오직 메달이 목표다. 메달을 따야 선수도 살고, 우리 종목도 산다”라고 말했다.





올림픽에서 금메달 하나를 거머쥐면 월 100만원이 나온다.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하나 따면, 병역 혜택은 주어지지만 연금은 없다. 아시안게임에서는 금메달 2개를 손에 쥐어야 월 30만원을 받는다. 메달에 따른 포상금은 선수가 속해 있는 협회 사정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저녁 7시, 땅거미가 지자, 선수촌은 약간 활기를 띠었다. 선수들이 하나둘씩 선수촌 한가운데 있는 선수회관 1층으로 향했다. 선수회관은 선수촌 안에 있는 유일한 ‘외부’이다. 노래방 PC방 DDR 도서실 당구장 탁구장 영화관이 마련되어 있다. 극심한 훈련을 견뎌내고, 경기에서 승리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는 선수들이 스트레스를 푸는 공간이다.


이 날 저녁에는 레슬링 선수들과 자주 마주쳤다. 노래방에서 60kg급에 출전하는 송재명 선수를 만났다. 금메달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송선수는 발라드풍 노래를 좋아했다. 레슬링 선수에게 가장 힘든 순간은 경기 전날의 계체량이다. 경기 전까지 7kg을 빼야 하는 송선수는 “하루 정도는 물 한 모금도 못 마시는데, 1분이 한 시간보다 길다. 그 고통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


D-19일 밤 10시, 숙소의 불빛이 하나둘 꺼지고 있었다. 태릉 숲속은 고요했다. 체력과 기술력의 극지에 가 있는 선수들은 이제 자기 마음과 싸워야 한다. 터질 듯한 몸과 수면처럼 잔잔한 마음을 일치시켜야 한다. 그것이 그들이 (매 경기마다) 통과해야 하는 마지막 관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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