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S 특강 신학자 현경 교수
  • 이문재 편집위원 (moon@sisapress.com)
  • 승인 2002.07.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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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나 꼴뚜기다”

외국 영화에 나오는 소품 같은 피크닉 가방. 왼쪽 가슴 위에는 커다란 꽃. 2주 전부터 매주 수요일 오전 10시, 교육방송(EBS) 화면에 등장하는 현경 교수(본명 정현경·미국 유니온 신학대 종신교수)는 이제 막 소풍이라도 떠날 듯한 채비였다. 오후에 제자들과 만나기로 했다고 한다.

1991년 세계교회협의회 총회에서 일약 세계적인 여성 신학자로 떠오른 현경 교수는 기독교 신학자인 동시에 숭산 스님으로부터 ‘대광명’이라는 법명을 받은 불교학도이기도 하다. 노벨평화상 수상자·종교지도자 들로 구성된 세계종교평화위원회 회원이기도 한 현경 교수는 자신을 ‘살림이스트’라고 말한다. 지구와 생명을 살려내는 사람. 그가 교육방송 특강에서 ‘내 안에 있는 여신을 찾자’고 주장하는 것도 생명평화운동의 연장이다.

하지만 보수 진영에서는 그녀를 수용하지 않고 있다. 젊은이들은 박수를 보내고 있지만, 보수 교회는 그에게 ‘레드 카드’를 내밀고 있다. 지난 7월13일(토) 오전 9시, 서울 인사동 경인화랑 찻집에서 기자와 마주 앉은 현경 교수는 월드컵 열기와 붉은악마들에 대한 예찬으로 말문을 열었는데, 인터뷰 내내 거침이 없었다. 어떤 사안에 대해서도 물러서거나 비켜가지 않았다.

왜 이름에서 성을 뗐는가?

호주제 폐지를 위해서 그랬다. 이름도 바꿨다. 원래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은 어질 현(賢)에 구슬 경(璟)으로 아주 여성적이었는데, 검을 현(玄)에 거울 경(鏡)으로 바꾸었다. 검은 거울. 도교와 불교에서 의미를 빌려온, 일종의 메타포다. 부서진 여성들이 나를 찾아와 ‘이 세상에서 누가 가장 예쁘냐’고 물으면 ‘그건 바로 당신’이라고 말해줄 것이다.


요즘 신세대를 어떻게 보는가?

요번에 책(<미래에서 온 편지> <결국은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할 것이다> 1·2권)을 펴낼 때, 지구를 구하는 민병대(살림이스트)를 모집했는데, 자원하는 젊은이가 많았다. 붉은악마도 그렇고, 우리 때와 달라서 너무 귀엽고 예쁘다. 그 책 뒷표지에 이렇게 쓰려고 했다. ‘경고:30대 이상의 남자가 이 책을 볼 경우 심신 장애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그런데 출판사가 반대했다. 제목도 ‘그래, 나 꼴뚜기다’라고 붙이려 했다.


왜 하필 꼴뚜기인가?

1991년에 세계교회협의회 사상 처음으로 제3 세계 여성으로서 주제 강연을 했다. 사물놀이패와 호주 원주민 무용수를 데리고 가서 공연도 펼쳤다. 그때 제3 세계와 여성 신학자들은 2천년 간 지속된 유럽 신학·남성 신학·엘리트 신학의 패러다임을 뒤집는 신학이 나왔다며 엄청난 반응을 보였다. <뉴욕 타임스>를 비롯해 세계적인 신학 잡지에 다 소개됐는데, 한국에 왔더니 교계 보수 매체가 ‘어물전 망신은 꼴뚜기가 시킨다더니’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때는 나를 죽이겠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꼴뚜기가 문제가 아니라 어물전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닌가. 생선에 위계 질서를 주입한 것은 인간이다.


요즘도 그런가?

요즘은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 더 많은 것 같다. 그래도 보수 교회에서는 내 책을 절대 읽지 말라고 한다.


교육방송 텔레비전에서 ‘21세기 특강’을 맡았는데, 주제가 무엇인가?

메리 데일리가 이런 말을 했다. ‘신이 남자이면, 남자가 신이 된다’. 그렇다고 여자가 신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남자를 노예화하자는 것이 아니다. 남자도 여자 못지 않은 가부장제의 피해자다. 피라미드 구조인 남성중심주의를 축구공 구조로(웃음) 바꾸어서 모든 사람들이 똑같은 반지름에 있는 그런 문명을 만드는 게 페미니즘이다. 인류사 전체로 보면 여신의 시대, 모계 사회가 훨씬 길었다. 5천 년을 이어온 가부장제는 트림 한 번 하는 것에 불과하다.

여신의 시대는 어떤 시대인가?

평생 여신 문명을 연구한 UCLA의 고고학자 마리아 김바투스에 의하면 신이 여신이던 시대, 모계 시대가 훨씬 평화롭고, 군사력보다는 농경 문화와 예술이 꽃을 피웠다고 한다. 수직 관계가 아니라 수평 관계이다. 문명의 핵심이 정복이 아니라 축제와 나눔이고 돌봄이었다. 이것이 에코 페미니스트들이 말하는 21세기 새로운 문명이다. 사람을 가장 억압하는 것이 종교적·상징적 억압이다. 여자를 가장 억압하는 것도 종교다. 제도나 의식보다는 상징·영성·종교성 등 무의식이 바뀌어야 한다.


왜 기독교신학을 선택했는가?

학생운동 때문이다. 나는 신학은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문학 소녀였다. 그런데 내가 학교에 들어가자마자 계엄령이 선포되었고, 우리 선배들이 남자들에게 개 끌려가듯이 끌려갔다. 그 이유가 뭔지 알고 싶어하니까, 교회 남자 선배가 그 이유를 알려주겠다며 데리고 간 곳이 창녀촌이었다. 그곳에서 야학 교사를 했고, 청계피복노조의 오락 교사도 했다. 나는 3대째 기독교 집안인데, 창녀촌을 보고 나서 ‘하나님은 없다. 있다면 직무 유기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신과 싸워야 답이 생길 것 같아서 신학을 택했다.


초교파 연구는 언제 시작했나?

숭산 스님의 제자가 되면서 불교 명상을 시작했고, 7년 전 세계종교평화위원회에 들어갔다. 달라이 라마를 비롯해, 불교·이슬람 지도자, 노벨평화상 수상자들과 일하는데, 그분들을 만나면서 종교는 언어 시스템이라는 걸 알았다. 하나의 궁극적 존재를 서로 다른 언어로 표현할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현경 교수의 책에 나오는 ‘여신 10계명’을 보면 ‘여신은 기, 끼, 깡이 넘친다’는 대목이 있다. ‘깡’이라는 표현이 부적절해 보인다.

깡이 없었으면 나 같은 여자가 구미 신학의 첨탑이라는 유니온 신학대학의 종신교수가 되었겠는가? 사실, 나보고 실력 없다고 말들을 하는데, 나는 이렇게 얘기한다. 실력이 없으면서도 여기까지 온 게 내 실력이다. 내 영혼의 실력이다. 내가 깡이 없었다면 지금까지 살아 남지 못했을 것이다. 한국의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이 ‘무당의 딸은 무당에게로, 교회는 교회답게’라는 삐라를 만들어서 뿌렸다. 그때 너무 불안해서 집을 옮긴 적도 있다. 그런데 마틴 루터가 ‘하나님을 믿어라. 그리고 과감하게 죄 지어라’고 말했다. 나도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깡으로 살 수 있었다.


보수 교단에 대해 할 말이 많을 텐데.

내가 왜 기독교인이냐면, 기독교처럼 가난한 자, 창녀와 세리 등 밑바닥 삶이 가장 먼저 천국에 간다고 한 종교가 없기 때문이다. 부서진 사람들에 대한 예수의 사랑 때문에 나는 기독교인이다. 우리 개신교는 예수님을 닮아야 한다. 딴 것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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